고려는 중기에 접어들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제반에서 상당히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을 합니다. 그 중에 가장 특이한 점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외척에 힘이 강화되고 문벌귀족이 고려 조정에서 강세를 이뤄 여러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고려의 15번째 국왕, 숙종의 즉위 과정, 그리고 숙종의 다양한 왕권정책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1. 선종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계림공과 이자의의 대립
이 고려 문벌 귀족 사회가 능숙해가는 단계에서 일어난 이 숙종과 예종의 왕권강화책 혹은 여러 가지 개혁정책은 궁극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로 인해 그 다음 예종의 아들 인종대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고 고려사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되는 이자겸의 반란, 묘청의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종의 아들 의종대에는 고려사회를 본질적으로 뒤엎는 무신의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숙종,예종,인종,의종의 부자상속으로 이뤄지는 4대 60년간 고려사회의 성격을 대단히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려사회가 삼체제 일 왕조, 하나의 왕조인데 체제가 세개다 라고 했을 때 그 첫 번째 해당하는 문벌귀족 사회 체제가 어떻게 해체되는가, 무너지는가, 약화되는가. 그런 부분들을 숙종의 즉위왕권 강화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숙종은 선종 사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계림공과 이자의의 대립이라고 하는 식으로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1.1. 계림공의 왕위 찬탈
문종의 여러 아들들이 있었고 그 아들들은 대체적으로 인주이씨 자녀들이었습니다. 문종의 아들 두 명이 형제상속을 했습니다. 선종이 조야에 재신들에 힘을 받고 있는 계림공(숙종)을 제외하고 그에 아들 헌종, 어린나이에 헌종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그러자 계림공이 정치적인 야망 또는 실제적으로 인주이씨 이자의가 난을 일으켰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자의의 난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외척인 인주이씨의 정치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기가 갖고 있던 사병집단 혹은 공상조회로 불리 우는 하층계층, 그리고 소태보와 왕국모를 중심으로 한 2군 6위의 상위집단과 연결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렇게 군사력과 상업세력의 도움으로 왕권을 차지하였습니다. 또 당시 중앙의 대다수 문무반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1.2. 숙종과 세조의 유사점
숙종의 즉위 과정은 고려 중기에 외척 문제와 왕위계승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변화와 요구에 응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이 당시 고려 사회는 여전히 외적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고, 형제상속과 부자상속 같은 왕위계승 문제도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은 새로운 변화를 꾀해야 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즉위를 이끈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린조카 헌종은 숙종이 이자의의 난을 통해서 실력자로 부상하자 선양(왕을 물려주다)하게 됩니다. 숙종의 즉위과정은 조선시대 수양대군, 즉 세조의 즉위 과정과 흡사하다고 합니다. 세조는 어린조카 단종을 내 몰고 본인이, 김종서와 황보인 같은 세력을 내 몰고 사병집단을 동원해서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흡사 세조가 수양대군이 숙종에 즉위과정을 그대로 본 딴 것이 아닐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현종의 선양으로 숙종의 즉위
2.1. 숙종의 인사 단행
숙종은 즉위 이후에 인주이씨 세력들을 제거하고 중앙정계를 개편합니다. 자기 즉위를 도와주었던 소태보를 문하시중으로 삼고 자기 측근을 내거는 인사를 단행하였습니다. 또한 즉위 과정에서 공로가 있는 세력들을 수없이 많이 등용합니다. 그래서 이 숙종이 즉위할 당시에 어떤 이러한 공로가 있는 자가 등용되는 것에 대해서 공상조회 같은 하층계층의 사람들이 지위를 뛰어넘어서 수 없이 많이 승진되었습니다.
[관련사료] 숙종 즉위 직후 인사 단행
무인일. 소태보(邵台輔)를 수태위(守太尉)·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김상 기(金上琦)를 수사도(守司徒)·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 書門下平章事)로, 유석(柳奭)을 수사공(守司空)으로, 임개(林槩)를 중서시 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형부사(判刑部事)로, 왕국모(王國髦)를 수사 도(守司徒)로, 손관(孫冠)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참지정사(參知政 事)·판호부사(判戶部事)로, 최사추(崔思諏)를 수사공(守司空)·추밀원사(樞 密院使)·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로, 김선석(金先錫)을 지추밀원사(知 樞密院事)로 임명했다.
[『고려사』 권11, 세가11 숙종 즉위년 10월]
2.2. 정치세력의 포용
숙종의 즉위 직후 인사 단행을 보면 무력적으로 권력을 쟁취하긴 했지만, 당시에 유력한 정치 세력들을 포용하였습니다. 즉, 등극에 직접적인 반대 견해를 취하지 않은 재추들을 그대로 포용하게 됩니다. 김상기, 그다음에 최사추로 중심이 되는 문벌귀족들에게 주요 직책을 부여하고 그들을 통해서 왕권 강화를 시도합니다. 숙종의 즉위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졌던 데에는 이처럼 재추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2.3. 외척 세력의 배척
왕실과 중첩적인 혼인 관계를 맺어온 인주 이 씨를 중앙정계에서 철저하게 배제하게 되어 외척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하였습니다. 숙종 재위 기간에 중앙정계에서 활약한 인물로는 이오李䫨라는 인물 한 사람 뿐이었을 정도로 인주 이 씨 세력을 정계에서 철저하게 배제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계림공 시절 혼인했던 정주 유 씨 유흥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고 여러 명의 비를 맞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숙종 당대에는 왕권이 강하기 때문에 정주 유 씨가 외척으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3. 숙종의 왕권강화 정책
3.1. 안정적인 후계구도
아들 중 예종으로 등극하게 되는 태자를 왕태자로 책봉하면서 그 태자의 지위를 관리하는 첨사부를 강화합니다. 첨사부는 1022년(현종 13년) 장자 연경군延慶君 흠欽을 왕태자로 책봉하며 설치되었습니다. 숙종은 선종 사후 이후 어린 헌종의 지휘가 약화된 경험을 바탕으로 태자에게 보다 안정되게 왕권을 물려주고자 하는 의도로 1098년(숙종 3년)에 첨사부에 첨사부·좌춘방·연경궁사 등의 관부를 갖추는 등 다양한 관부를 둡니다. 후계 구도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려는 첫 번째 왕권강화책입니다.
태자의 지위 강화를 위해서 첨사부의 기능을 강화하는데 윤관이라고 하는 자기 측근 세력뿐만 아니고 소태보, 황유현, 황영黃瑩과 같은 즉위에 공로가 있었던 인물, 김상기, 최사추 등 당시 중앙정계 요직에 있었던 인물, 윤관尹瓘, 위계정魏繼廷 등 새로이 중앙정계에 진출한 인물 등을 임명하게 됩니다. 또한 1100년(숙종 5년)에 왕자 우俁를 왕태자로 책봉하고, 첨사부와 춘방 소속관원에 대해 2등급씩 가자加資하여 태자의 지위 더욱 공고히 하였습니다.
[관련사료] 첨사부 설치
계해일. 왕이, “과인이 덕이 부족하나마 맏아들을 두었으니 태자의 자리[震 位]에 올려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며, 해당 관청에 지시해 태자를 세우게 하고 첨사부(詹事府)·좌춘방(左春坊)·연경궁사(延慶宮司) 등의 관아를 갖추 고 노비[皂隸]와 식읍[采邑]을 다 여기에 소속시켰다. 또한 소태보(邵台輔)를 태사(太師)로, 김상기(金上琦)를 태부(太傅)로, 최사 추(崔思諏)를 태보(太保)로, (중략) 위계정(魏繼廷)·이오(李䫨)·조인충(趙藺 忠)·곽상(郭尙)을 모두 빈객(賓客)으로, 김한충(金漢忠)과 홍기(洪起)를 좌· 우서자(左右庶子)로, 유신(柳伸)과 김경용(金景庸)을 좌·우유덕(左右諭德) 으로, 윤관(尹瓘)을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로, (중략) 유재(劉載)를 시 독(侍讀)으로, 강증(康拯)을 중윤(中允)으로, 유인무(柳仁茂)를 사의랑(司議 郞)으로, 장경(張景)을 약장랑(藥藏郞)으로, 최인필(崔寅弼)을 궁문랑(宮門 郞)으로, 이후(李侯)를 솔경(率更)으로, 황유현(黃兪顯)을 시위(侍衛)로, 오 손경(吳孫慶)과 최유정(崔惟正)을 좌·우청도솔부솔(左右淸道率府率)로, 나 준(羅俊)과 궁제(弓濟)를 좌·우감문(左右監門)으로, 최정(崔挺)을 우위(右 衛)로, 최현(崔現)을 여분중랑장(旅賁中郞將)으로 각각 임명했다. 을축일. 백관이 표를 올려 태자부(太子府)를 세운 것을 축하하였다.
[『고려사 』 권11, 세가11 숙종 3년 3월]
3.2. 사상의 개편, 통폐합
두 번째 왕권강화책으로는 사상의 개편, 통폐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동생인 의천을 통해서 천태종을 개창하게 됩니다. 당시 대표적인 불교교단은 왕실과 연결된 화엄종, 그 다음에 외척 인주 이 씨, 경원 이 씨와 연결된 법상종 교학불교들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경원 이 씨, 인주 이 씨와 관련이 깊은 법상종 등 교종이 중심이었던 당시 사원 세력을 재편성하기 위해서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이전에 퍼져있던 선종을 흡수해 통합해서 천태종을 개창하게 됩니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아들이고 숙종의 동생이고 자기 형에 즉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도와준 권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천은 불교계에 개혁이라고 하는 명분을 내걸고 왕권 강화 정책을 천태종 개창을 통해서 도와주게 됩니다. 또 이런 천태종 개창을 펼칠 수 있는 사찰로 국청사를 열어 이러한 종교정책을 퍼나갑니다. 또 의천은 송나라에 가서 여러 대장경을 가지고 오고 대장경에 간행에도 힘썼을 뿐만 아니고 자기 형 숙종이 추진하는 주전정책, 화폐정책을 적극적으로 이끄는 데 앞장섭니다.
3.3. 주전도감과 해동통보
당시 고려사회는 주로 쌀과 포로 교환수단을 삼고 있었습니다. 이런 쌀과 포가 교환과 운반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여기서 파생되는 부정적인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숙종은 즉위 6년 주전도감을 설치하여 은병을 주조하고 또 해동통보를 만들게 됩니다. 이것은 농민을 보호하는 측면과 지배 세력에 대한 견제의 측면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국가 경제력과 왕권을 강화하는 것으로 연결이 됩니다.
[관련사료] 숙종의 주전정책
숙종 2년(1097) 12월.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풍속이 소박하였는데, 문종 때 에 와서 문물과 예악이 융성하게 되었다. 짐은 선왕의 업적을 계승하여 장차 민간에 큰 이익을 주기 위해 화폐를 주조하는 관청을 세워 백성(百姓)들 간 에 널리 유통시키고자 한다.” 6년 4월. 주전도감(鑄錢都監)에서,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전폐(錢幣) 사용의 편리함을 알게 되었으니 이 사실을 종묘에 고하자고 건의했다. 이 해에 또한 은병(銀甁)을 사용하여 화폐로 삼았는데 그 형태는 은 1근으로 우리나라 지 형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속칭 활구(濶口)라고 하였다. 7년 12월. “민들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전화(錢貨)만 큼 중요한 것이 없다. 서쪽의 송나라와 북쪽의 요나라에서는 이를 유통시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우리나라만 홀로 아직 유통시키지 않고 있다. 지금 비 로소 화폐를 주조[鼓鑄]하는 법을 제정하노니, 이에 따라 주조한 전(錢) 15,000관(貫)을 재추·문무양반·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어, 유통의 시초[權輿] 로 삼으며 전의 이름을 해동통보(海東通寶)라 한다. 또 처음으로 전폐을 사 용하는 사실을 태묘(太廟)에 고할 것이며, 경성(京城 : 개경) 좌우에 주무(酒 務)를 설치하고 또 거리 양쪽에 존비에 상관없이 각자 점포를 설치하게 해, 전폐 사용으로 인한 이익을 일으키라.”
[『고려사 』 권79,지33, 식화2 화폐]
화폐정책과 관련된 사료에서 숙종 2년에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풍속이 소박하였는데, 문종 때에 와서 문물과 예악이 융성했습니다. 짐은 선왕의 업적을 계승하여 장차 민간에 큰 이익을 주기 위해 화폐를 주조하는 관청을 세워 백성들 간에 널리 유통시키고자 한다. 라고 시도를 하게 됩니다. 명분은 민간에 큰 이익을 주기 위해서 화폐를 주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4년 뒤에 주전도감을 세웠지만, 화폐는 잘 유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 돈을 1,500관을 주조하여 재추, 문무 양반, 군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이것으로 돈을 쓰게 합니다. 이 돈을 해동통보라고 하고 주모, 주막을 설치하여 이곳에서 돈을 쓰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전정책은 궁극적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숙종은 화폐유통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대체로 3가지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원에 많은 경제력이 집중해있었기 때문에 사원 중심에 경제체제를 왕권 중심으로 바꾸면서 왕권 및 국가재정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두 번째는 개경에 있는 문벌 귀족에 권력을 약화한다거나 무엇인가 지형의 변화를 주기 위해서 남경으로 천고를 계획합니다. 그러니까 이 남경으로 천도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정도의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재정적 뒷받침을 위해서 화폐 유통을 시켰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진족을 정벌하는 군사력 강화 기반에도 자본이 필요했을 것이다. 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왕실의 회복이라던가, 왕권 강화를 위한 이런 목적하에 어떤 국가적인 비상 상태에서 국가산업에 이익을 화폐라고 하는 즉, 왕실 밖에 있던 국가재정 그 이제 사원에도 있고 귀족들에게도 있는 이런 국가재정을 여진 정벌이라던가 혹은 왕권 강화와 같은 상당히 중앙집권적이고 국가동원 체제적인 성격 하에서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통해서 추진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3.4 남경에 중심을 둔 숙종
남경에 중심을 뒀다. 라고 하는 것은 지리도참사상을 이용한 왕권 강화 정책 중 하나입니다. 고려는 부처의 가호 때문에 세워졌고 지덕에 의해서 나라가 힘을 얻게 됐습니다. 훈요십조 가운데 두 번째 조항 “신라가 망한 것은 경주에 사원이 남설되어서 지덕이 쇠해 신라가 망했다. 그래서 지덕이 보다 더 강한 개경으로 공간에 어떤 힘을 옮겨서 고려를 건국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권력적 입장에서 풍수지리사상, 지리도참사상이 이용되다 보면 개경이 가진 권위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 지덕이 있다. 라고 하는 논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숙종은 남경에 지덕이 좋다고 하는 논리를 펼쳤고 인종 때에는 묘청과 같은 사람은 서경에 지덕이 있어서 개경에 지덕이 쇠하였다는 주장을 펼쳐 서경의 천도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 지배담론, 건국에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중간에 변형되거나 왜곡되어 사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숙종은 고려사회가 지리도참, 풍수지리사상을 이용해서 세워졌고 태조 왕건이 경주에 있던 공간적 권위를 개경으로 옮기는데 도선의 풍수 지리사상을 활용했기 때문에 본인의 왕권 강화를 위해 남경에 힘을 줌으로써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재상과 하위 관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양주에 남경을 건설(숙종 1년 김위제金謂磾의 남경 건설을 건의)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즉위 6년 재 본인이 화폐 정치를 시행하는 등 왕성한 개혁정책을 펼 때 남경 개창도감을 설치하여 최사추, 윤관, 임의 등을 파견하여 터를 보게 합니다. 최사추는 당대 최고의 문별 귀족으로써 즉위 과정을 도와줬고 윤관과 임의는, 윤관 같은 경우는 여진정벌에 앞장선 사람들인데 당시 이런 강력한 실력자들로 하여금 남경에 터를 잡게 하고 숙종 재위 9년째 궁궐을 완성하면서 남경 경영을 일단락 합니다. 물론 천도까지는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개경이 갖고 있던 공간적인 중심을 자꾸 이동하거나 해체, 변형시킴으로써 문벌귀족, 외척들이 가진 힘을 분산시키려고 노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5 별무반과 여진정벌
숙종의 또 다른 왕권강화책으로는 별무반과 여진 정벌을 들 수 있습니다. 숙종 후반기에 여진과 무력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윤관이 건의를 해서 숙종 9년에 별무반을 설치하게 됩니다. 별무반의 특징은 문무산관, 서리로부터 상인, 노복, 승려, 주, 부, 군, 현 에까 당시 고려를 구성하는 대부분에 계층을 상대로 군사를 징발하였습니다. 농민과 승려뿐만 아니고 문무 관료층의 자제들, 5품 이상 관료 자제들, 또 말을 가진 승려들을 전부 동원을 하였습니다. 고로 전시 동원체제가 이뤄지는 것이고 국왕 중심에 집권력이 강화되면서 왕권 강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별무반의 편성은 나중에 예종 때 여진정벌까지 이어지고 동북 9성을 획득합니다. 그 뒤 9성을 관리하기가 힘들어 기병이 우세한 여진족들에게 동북 9성을 반환하게 됩니다.
예종 때 숙종 당시에는 별무반의 설치와 여진과의 전쟁이 국가적인 중요한 사업이기 때문에 반발을 못 했던 문무 대신들이 예종 때 구성의 반환 이후로 패군치죄 즉 윤관이 어차피 패배할 군사를 이끌었다. 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윤관의 탄핵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줬던 윤관에 대한 정치적인 탄핵이고 숙종 때 이루어진 왕권강화책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습니다. 숙종은 본인이 인주 이 씨의 후손이면서 인주 이 씨 후손들과 이뤄지는 형제상속에서 배제가 된 채 어린 조카가 왕위를 계승하자 자기가 갖고 있던 사병적인 집단과 세력 그리고 무사 집단의 도움 당시 지배층에 묵인 한에 어린 조카 헌종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한 다음 인주 이 씨를 배제하고 다양한 왕권강화책, 후계 구도 강화를 위해서 첨사부에 기능을 확충했다거나 화폐 정책을 펼쳤다거나 또는 천태종을 새로 시작하여 어떤 인주 이 씨뿐만 아니고 어떤 문벌귀족들의 불교 세력을 약화했다거나 별무반을 편성해서 전시 동원체제를 강화했다거나 남경경영을 통해서 개경이 가진 공간적인 권위, 개경 중심의 지배체계를 와해시키려는 노력이 예종에까지 이어지고 예종은 즉위 이후에 아버지가 수용한 왕권강화책을 그대로 이어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