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외관계(1) – 5대 10국,송나라,거란

918년에 고려가 건국되면서 중국, 여진족, 후당, 후진 등 다양한 국가와의 교류와 관계가 혼란스러웠습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 내에서 고려는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해 복잡한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사대관계와 책봉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고려의 대외관계가 복잡한 이유

1.1 동아시아 국제 질서란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가장 쉽게 말하면 하늘의 뜻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중원의 정복국가가 그렇지 않은 나라들을 오랑캐라고 하는 이름으로 지배했습니다. 이를 중화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또한 중원을 차지한 왕조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관계를 동아시아 질서라고 하고 그것을 사대라고 부릅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동이, 서쪽에는 서융, 남쪽에는 남만, 북쪽에는 북적이라는 용어로 불리며 중국은 그 주변 국가들을 통솔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사대를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조공을 생각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중원을 차지한 정복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했습니다. 책봉이란 간단하게 중국 황제의 이름으로 “너는 이 나라의 국왕이다”라는 교서를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중국 황제가 사용하는 연호를 따라야했습니다. 연호란 연도를 계산하는 연도 계산법 혹은 일종의 달력입니다. 세 번째는 조공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2 고려의 상황

그러나, 고려는 이 사대관계가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고려는 918년부터 1492년까지 470년간 단일 왕조로 존속했지만 중국은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건국 될 당시에는 나라가 907년에 멸망한 이후로 5대(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晋-후한後漢-후주後周)10국(오·남당·오월·민·형남·초·남한·전촉·후촉·북한)의 혼란기를 겪습니다. 또한 960년에 송나라가 건국되지만 그 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와 같은 여러 왕조가 교차로 흥하고 쇠퇴하면서 고려는 계속해서 사대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선택의 방향에 따라 침략과 국내 정치적 위기와 또는 침략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2. 고려의 5대 10국과의 교섭

5대 10국과의 교섭 상황을 살펴보면 태조가 즉위해서 26년 동안 재위 하는 동안에 열두 번에 걸쳐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합니다. 태조는 태조 2년 오월국과의 교섭도 추진하죠 이 때 오월에서 문사 추언규酋彦規 라는 사람이 귀화하기도 합니다. 5대와 관계 속에서는 후량(907~923)과 교섭을 해서 태조 6년 923년 윤질尹質 이라는 관료를 파견하기도 하고 오월군 문사 박암朴巖이라는 사람이 귀화해오기도 합니다. 그 뒤 후량이 망하고 후당이 들어섰을 때 또 후당(923~936)과 교섭을 시도해서 장빈張彬이라는 사람 혹은 임언林彦 이라는 관료들을 파견하고 929년(태조 12년)에는 대규모 국신사를 파견합니다. 또한 934년(태조 15년) 왕건이 후당으로 책봉을 받습니다. 중원의 나라로부터 “너는 고려의 국왕이다”라는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후진(936~946)이 들어서서 후진과의 교섭이 다시 진행됩니다. 왕규와 형순 파견하여 고조高祖 석경당石敬瑭의 등극을 축하하고 그 다음해부터(938년 7월) 후진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후당으로부터 왕건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검교태사檢校太師’ 라는 책봉을 받습니다. 태조 왕건 이후로 즉위한 혜종은 한현규, 김렴을 보내 왕위 계승을 알리고 거란 격파 축하 후당으로부터 ‘지절현도주도독持節玄菟州都督・상주국上柱國・충대의군사充大義軍使・고려국왕高麗國王’ 이라는 이름으로 책봉을 받습니다. 948년(정종 3년)에는 후한(946~950)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광종 때에는 5대 마지막 국가인 후주와 교섭을 해서 951년(광종 2년)에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953년에는 후주에서 왕연王演과 여계빈呂繼贇을 보내 광종 책봉을 하였고, 955년 955년 광평시랑 순질을 후주에 보내 세종世宗의 즉위 축하하고 후주 출신 쌍기의 귀화를 받아들여서 쌍기의 건의로 958년(광종 9년)에 처음으로 과거제를 실시합니다.

태조가 즉위한 이후로 광종대 까지가 5대 10국에 해당되는 시기인데, 이 당시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로 건립된 국가이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강력한 중국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고려는 5대와의 관계를 통해서 정치적 지원 물자의 교역 및 선진문화의 수입을 하였습니다.

3. 고려의 송과의 친선 외교

960년 조광윤이라는 사람이 후주로부터 선양, 선위의 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아서 송나라를 세웁니다. 그 뒤 926년(광종 13년)에 송나라와 고려가 국교를 개시합니다. 광평시랑 이흥우라는 사람을 파견해서 교빙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송나라하고 기본적으로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여전히 북방의 유방 민족으로 있는 거란과 여진과의 관계도 유지를 해야 되는 복잡한 단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송나라는 건국 이후에 연운 16주 중국에 베이징과 다퉁을 중심으로 만리장성 남쪽에 있는 16개국 주에 해당합니다. 거란이 936년 5대10국 중 하나였던 후진을 도운 대가로 후진으로부터 얻은 땅입니다. 이 지역은 북방의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송나라가 나라를 세우고 나서 가란과 연운 16주를 두고 다투게 됩니다. 연운16주는 위쪽으로 거란이 차지하고 있고, 아래쪽으로는 송나라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이 뺏고 뺏기면서 이 지역을 둘러싼 거란과 송나라의 관계는 고려의 대외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렇게 송나라와의 관계에 거란이 개입을 하게 됩니다. 993년(성종 12년)에 거란이 고려에 침입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공식적으로 고려와 송의 국교가 일시적으로 중단됩니다. 1011년(성종 30년)째에 단절된 이후로 1071년(문종 25년) 때에 다시 재개를 하게 됩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송나라의 선진문물을 계속 수입해야 할 필요가 있고 거란을 계속 견제해야 하기 때문에 송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거란과의 관계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4. 요나라 거란과의 통교

거란은 성종 때 1차(993) 침입을 받은 이후로 2차(1010), 3차(1018) 침입을 계속 받게 됩니다. 1차 침입 때에는 서희의 담판으로 물리치게 됩니다. 2차 침입 때는 소위 말해서 강조정변이라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서 거란이 침략을 해옵니다. 강조정변은 목종 때 목종의 생모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면서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천추태후가 김치양이라는 관료와 불륜관계를 맺어 그 사이에서 나온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에 목종은 서북면을 지키는 강조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1009년 강조는 정변을 일으켜 대궐로 들어가 김치양과 천추태후 일당을 제거하게 됩니다. 이후 강조는 목종마저 폐하고 대량원군(현종)을 왕으로 내세우게 됩니다. 이 때 거란의 입장은 자신들이 책봉해준 목종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이 들어섰다고 하니 이것을 빌미로 침입을 하게 됩니다. 현종 때에 현종이 공주까지 피난을 가는 곤혹을 겪으면서 1019년(현종 10년) 화약이 성립이 되고 평화적 단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강조 패배로 고려는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패배하지만은 않았고 거란이 강화 요청을 받아들여 퇴각하는 도중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습니다. 그 뒤 거란은 3차 침입을 하는데 3차 침입 때는 유명한 감간찬의 귀주대첩이 거란군을 쓸어버리기도 합니다. 효과적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동아시아는 송나라, 요나라, 고려의 3국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가 되는 관계에서 고려와 거란의 관계도 대장경을 주고받는 등 일정한 정도의 대외관계를 유지합니다. 또한 강감찬의 건의로 대외 방어를 위해서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서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기도 합니다.

5. 금나라의 등장과 고려의 교역

5.1 금나라와 송나라의 관계

12세기 초가 되면서 금나라가 건국(1115)됩니다. 금나라는 송나라를 계속 괴롭힙니다. 송나라는 금나라로부터 숙질관계를 강요받습니다. 치욕적인 요청을 받고 소위 말하는 정강의 변(1127)이라고 하는 것을 당하게 됩니다. 정강이라는 것은 송나라의 흠종이라는 황제의 연호입니다. 이 휘종과 흠종이 납치되고 송나라의 수도인 변경이 함락됩니다. 그리고 송나라는 쫒겨서 남송으로 옮겨가게 되고 1142년에 소흥조약이라고 하는 것을 맺어서 칭신상표(稱臣上表) 즉 금나라에 대해서 신하를 칭하고 표를 올리게 됩니다. 또한 책봉조공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송은 급속도로 약화되게 됩니다. 이 시기에 고려 입장에서는 송이 저렇게 쇠락해 가는 단계에서 전통적인 한족이 세운 송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려는 관계 속에서 송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계속 송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들과의 관계를 맺으라고 하는 요청을 받습니다. 이에 고려가 불응하자 거란의 침략과 금나라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수차례 침략을 통해서 굴복을 시키는 대외적인 침략을 받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5.2 금나라와 고려와 관계

초기 금나라 건국전 고려는 여진족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혹은 회유책을 병행하면서 초기에는 여진이 말과 가죽을 바치며 여진족이 아버지로 모시는 부자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하지만 12세기 초에 여진에 완안부라는 사람이 세력을 키우면서 군사적 충돌이 빈번해집니다. 1104년(숙종 9)에 임간, 윤관 등 여진과의 군사충돌을 막기 위해 출전하였으나 패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신기군(기병), 신보군(보병), 항마군(승병), 조탕 등을 포함하는 특별부대, 양반과 백정농민을 중심으로 승려, 상고商賈, 노예까지 동원된 거국적 조직 별무반을 조직해서 여진을 정벌하게 됩니다. 그 뒤 1107년(예종 2)에 여진 정벌 개시하였습니다. 윤관, 오연총 등 기습작전으로 갈라전 일대 점령하게 되고 9성을 구축하였지만 기마 민족인 여진들에게 계속 지키기가 어려워 여진에게 환부해줍니다. 이 때 당시에 숙종과 예종은 왕권 강화책으로 여진을 정벌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국내적으로는 문벌귀족을 제압하려고 하는 내부의 정치 상황과 이어집니다.

1115년(예종 10년)에 아골타阿骨打 황제 칭하고 금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 뒤 1117년 고려에게 형제관계 요구하며 화친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당시 부자관계였던 아들을 자처했던 여진이 갑자기 형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고려 내부에서는 이번 기회에 금나라를 정벌해서 국력을 신장하자라고 하는 금국정벌론, 중원이 힘을 누가 집중해서 차지하고 있지 않으니 우리 스스로를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자는 칭제건원론이 등장하게 됩니다. 예종에서 인종 초에 걸쳐 국내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것은 북방 쪽으로 진출하자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역사 계승의식 중 하나인 고구려계승의식이 강력하게 작동을 하였습니다. 이 의식은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이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평양을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서경에 있는 세력들이 예종 때 중앙 정계에 진출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서경의 세력들은 인종 초 이자겸의 반란으로 서경, 개경에 있는 궁궐이 불타버리는 상황을 개경의 지덕이 다 쇠했지 않느냐는 주장을 펼치고 서경으로 천도를 해야한다는 서경천도 운동이 일어나는 대외적으로 혼란한 상황이 펼쳐지게 되면서 1126년(인종 4) 3월 고려의 ‘칭신상표稱臣上表’으로 사대관계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려 시대의 대외관계는 정말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와의 맞물림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국가 안전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5대 10국과의 교섭과 송나라, 요나라, 그리고 금나라와의 관계는 매우 어려웠지만, 고려는 국익과 안전을 위해 상황을 잘 판단하고 외교 정책을 수립해 나갔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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