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포스팅에서는 5대 10국,송나라,거란과의 관계에 대해서 포스팅하였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13세기 몽골과의 외교관계 성립, 고려의 원 간섭기, 그리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이라는 세 가지 주요 주제를 포스팅하겠습니다.
1. 13세기 몽골과의 고려의 외교관계 성립
송이 완전 소멸되어 가고 중국의 중원의 힘이 거란에서 여진으로 옮겨가는 관계에서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상당한 혼을 겪게됩니다. 또한 무신난을 통해서 왕조 자체가 무력화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때 대외적으로는 북방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12세기는 거란에서 여진으로 힘이 옮겨갔고 13세기가 되면서 몽골족이 흥기를 하게 됩니다. 몽골족에서는 鐵木眞〔테무진〕이 등장해서 분열된 몽골 고원을 통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테무진이 成吉思汗[칭기스칸]으로 추대가 되서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게 됩니다. 몽골은 칭기스칸 사망이후에도 정복전쟁을 계속하여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로마에 의해서 강력한 세계제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때 동아시아에 있는 국가들은 대부분 몽골에 예속되게 됩니다. 그리고 몽골은 금나라를 정벌하고 요동지역을 공략해서 거란을 무력화 시키고 다음에 고려에 쳐들어와 형제맹약을 맺으면서 외교관계가 성립되게 됩니다.
몽골의 침략 당시 고려는 왕조는 있지만무인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몽골에 항복을 한다는 것은 무인정권이 제거되는 것이기 때문 무인들이 왕조 유지의 명분을 내걸고 강화도로 천도를 해버립니다. 천도를 하면서 40년 동안 몽골과 대항을 하는데 이 당시 본토에 있던 백성들은 무수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몽골과의 관계는 고려 후반기 100년에 이르러 각 종 어려운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1225년 고려를 방문한 몽골제국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정체 불명의 괴한들과 맞서 싸우다가 살해를 당합니다. 그 뒤 살례탑이라고 하는 사람이 제1차 침입(1231)을 하게 됩니다. 침입의 결과로 화의가 이루어져서 다루가치가 설치됩니다. 그 다음해에 1232년 최씨정권의 강화도로 천도를 합니다. 이로 인해 몽골이 2차침입(1232)을 하게 되고 이 때 부인사 초조대장경 소실되었지만 처인성(김윤후) 전투와 같은 승리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몽골은 제3차 침입(1235~1239)을 하게 되고 경주 황룡사 9층탑을 소실하게 됩니다. 각지 군민이 대항하고 전쟁이 장기화가 되어 몽골에서는 강도에서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라는 요구에 그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1259년 강화 성립되고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태자(원종)이 입조를하게 됩니다.
이 때 배종손, 노영희를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봉기를합니다. 이후에 진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기나긴 항쟁을 하게 됩니다. 진도로 이동을 해서 용장성을 세우고 정부와 대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진도 정권이 붕괴되고 제주도로 옮겨서 결국은 여몽연합군에게 진압이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2. 고려의 원 간섭기
삼별초 항쟁이 끝나고 원에 복속된 상태로 되면서 원의 간섭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요소로 말하는 것이 부마국이 됐다는 겁니다. 원종 다음으로 즉위한 충렬왕이 원 세조의 딸과 혼인을 해서 부마국이 된 것입니다. 이런 부마국이라는 표현 자체가 원에 복속된 간섭을 받는 의미라고 이해가 되지만 고려의 국왕이나 왕자들이 중국의 왕실에 딸과 혼인하는 사례는 많이 있습니다. 이는 전략적으로 하기도 하는 것이고 특히 충렬왕은 부마국을 자처 하게 됩니다. 충렬왕이 스스로 국내에서 자신의 국내적인 정치 안정을 위해서라던가, 몽골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안으로 스스로 세조의 딸을 맞이하는 대단히 주체적인 입장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몽골에서 시켜서 부마가 됐다고 하는 것과 충렬왕이 스스로 부마를 자처한, 굉장히 적극적인 대외정책이다 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충렬왕 때에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기 위해 여원연합군을 만들고 고려에 둔전경략사를 설치하여 막강한 군량이나 군사를 요청합니다. 2차에 걸친 일본정벌이 실패하고 고려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겪게 됩니다. 그 뒤 정동행성을 설치합니다. 원래 정동征東이라는 것은 일본을 원정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일본 원정이 실패하여 이는 없어져야 하지만 정동행성을 1280년(충렬왕 6년)에 설치한 다음에 해체하지 않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고려 말까지 존속을 하고 내정 간섭하는 기구로 바뀌게 됩니다. 또한 이로 인해 입성책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려라는 나라를 없애려고 하는 원나라의 입장과 고려 일부의 신료 입장으로 고려라는 국가를 없애고 하나의 성으로 만들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행이게도 이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1258년(고종 45년)에 원나라가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해서 철령을 경계로 하여 화주 이북, 정주 이남 지역을 관할 하에 예속하게 됩니다. 물론 이는 1356년(공민왕 5년)에 완전히 수복하게 됩니다. 1270년(원종 11년)에는 서경에 동녕부 설치하여 직할령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삼별초를 토벌한 이후에는 탐라총관부를 설치를 하여 자신들에게 필요한 말을 활용하기 위해 목마장을 설치하게 됩니다. 이 여, 원 관계 속에서는 복속관계와 침략과 저항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적, 물적 교류가 굉장히 많아집니다.
몽고풍 문화가 유행하며 몽고와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원의 독로화, 공녀제도, 환자 진공 요구 등과 같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고려 문사의 원 과거 응시와 학자 교류를 통해 지식과 지혜가 나뉘어졌으며, 다양한 명목의 물적 자원 교환도 이루어졌습니다. 금, 은, 저포, 자기, 웅피, 호피, 해동청, 인삼 등 다양한 자원들이 교환되면서 경제적 교류도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3. 공민왕의 반원정책
공민왕의 반원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원의 쇠망과 명나라의 흥기와 연관이 됩니다. 공민왕 5년에 반원정책을 실시했는데, 1367년(공민왕 17년)에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을 하고 설사偰斯를 파견해서 건국을 알립니다. 그리고 1369년에 고려는 원나라의 연호사용을 중지합니다. 쉽게 말해서 원나라 사대관계를 끊겠다. 라고 하는 첫 번째 시도입니다. 또한 홍상재를 명나라에 파견해서 홍무제의 등극 하례를 합니다. 그리고 원나라 연호를 중지한 1369년 다음해인 1370년에 명나라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정식으로 국교를 성립하고 명나라의 사대관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공민왕은 동녕부 정벌, 관제개혁, 국사편찬 등의 정책을 펼치며 반원친명 정책을 쓰는 단계에 들어섭니다. 그런데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서 많은 요구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을 하게 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인임 정권이 들어서서 원나라 명나라 두 나라에 걸치는 양단 외교를 펼칩니다. 명에 전왕의 시호와 새 왕의 승습 요청 사절 파견, 북원 납합출 사절 맞이하는 등 계속되는 명의 위압적 외교 속에서 거듭 사절을 파견하며 원만한 관계 모색하게 됩니다. 1387년(우왕 13년)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하였을 때 명나라에서 무리한 공물을 요구합니다. 이 때 최영이 집권을 하느 시기였고, 요동을 정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 세력이 실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성계와 신진사류들은 반원친명 정책으로 돌아서는 노선을 유지하게 됩니다.
동아시아 세계 질서와 고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복잡하고 대내적인 정치 관계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고려 사회의 성격을 복잡한 대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세계 질서는 중심국가, 주변국가로 서열화 되어있고 중국 중심의 천하관, 화이사상華夷思想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책봉 중심의 국제질서가 형성이 되어있는데 물론 이것은 일방적인 상하종속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조공과 책봉관계도 상당히 의례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국제질서, 다만 연호와 책봉이라고 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작동하였으나 그 속에서 고려는 늘 실리외교를 취해왔습니다. 송과는 조공, 책봉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문물을 수입하고 원나라의 관계 속에서도 치열하게 저항을 합니다. 고려는 단 한 번도 정복 왕조의 침략에 대해서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하고 물리적인 힘의 한계에 부딪혀서 약한 단계에서 강화를 맺어야 될 때에는 최대한 실리를 취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470년의 고려왕조를 유지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