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고려 고구려를 계승의식의 등장

고려는 거란을 포함해 항상 대외관계가 복잡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나라가 907년에 멸망을 합니다. 송나라가 960년에 건국이 되었습니다. 이 때 당시 중국은 권력이 자주 바뀌는 5대10국의 사회였고 고려는 이 상황에서 어느나라의 연호를 따라야하고 어느나라에게 사대를 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끝없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 때 힘이 세지는 국가와 힘이 몰락하는 국가 사이에서 교차되는 지점에 있어서 새로 성장하는 국가에게 침략을 받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고려거란전쟁에 대해서 포스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0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5대10국의 혼란

고려는 대외관계가 복잡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나라가 907년에 멸망을 합니다. 송나라가 960년에 건국돼서 당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중원을 송나가라 차지하게 되는데 그 시절을 5대10국 시대라고 표현합니다. 중국의 쟁패 과정이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의 5대와 마초(馬楚), 오(吳), 오월(吳越), 전촉(前蜀), 민(閩), 남평(南平), 남한(南漢), 후촉(後蜀), 남당(南唐), 북한(北漢)으로 불리우는 10국 과정을 거치면서 송나라 조광윤이 이들을 정리해서 송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조광윤의 송나라 건국

고려는 918년에 건국이 되었기 때문에 후량을 비롯해 오우러 등에 사신을 보냈고 동아시아 국제 질서 상에 중원을 제외한 나라는 중원을 정복한 국가로부터 책봉을 받아야하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있었기 때문에 고려 국왕들은 후당(後唐)으로부터 책봉을 받거나 후주(後周)에 외교 관계 속에서 자신의 국내적, 또 대외적인 지위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광종은 후주(後周)의 쌍기를 불러들여서 계획정치를 추진하기도 합니다. 송나라는 960년부터 1279년까지 존속을 합니다.

고려거란전쟁_5대10국 지도

10세기의 거란

거란은 퉁구스와 몽골 계측에 혼혈족입니다. 예부터 요하 상류에서 오는 시라무렌 유역에 살고 있던 유목민족입니다. 고구려시대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고 일부가 복속되기도 했습니다. 907년에는 야율아보기라는 사람이 천왕으로 즉위를 합니다. 그리고 916년에는 중국 연호를 제정을 합니다. 또한 916년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 통합하여 대거란국을 세우고 926년 발해를 멸망시킵니다. 993년부터 1019년 까지 세 차례 고려를 침입합니다. 1125년 함흥지역에서 일어난 여진족에게 멸망이 되게 됩니다.

이렇게 여러 국가 들에게 둘러싸인 고려는 송나라에게 사대하던 것들을 옮겨가야하고 또 옮겨간 사대가 여진족, 금나라가 세운 여진족으로 넘어가야하고 또 여진족 다음에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로 넘어가는 이러한 과정을 겪게 되다 보니까 고려의 외교정책이 상당히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려거란전쟁:

태조의 정책

고려과 거란의 첫교섭은 태조 5년(922) 요나라의 초대 황제 야율아보기가 고려에 낙타와 말 등을 보냈다는 기사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20년 뒤 태조 25년 거란 태종이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보내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 태조는 굉장히 강경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발해를 명망시킨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두 번쨰로는 태조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다는 국토회복, 북진정책의 의지를 막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굉장히 강경한 태도를 취합니다. 고로 태조는 사신 30인 해도로 유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달아 굻어죽게 하였습니다.

거란의 1차 침입과 서희의 외교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다음에 거란이 요나라를 세우고 성종 12년(993)에 고려를 침략해오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침략은 소손녕蕭遜寧을 장수로 삼아 고려에 침입하였습니다. 북계로 들어온 소손녕은 적극적인 군사행동은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 합니다. 그래서 고려 조정에서는 외침에 대해서 중신을 시켜 항복vs서경 이북 땅을 베어주고 절령을 경계로 삼자는 견해(割地論)에서 이북 땅을 내어주자라는 쪽으로 기울거가고 있을 때 서희라는 장군이 등장합니다. 이 장군은 문신출신관료입니다.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통해서 군사를 물리쳤다. 이것을 우리는 서희의 담판이라고 말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밑에 관련사료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결과로 서희의 변론에 소손녕은 군사를 돌렸고, 약속대로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 땅을 개척하는 데 동의하는 글을 보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거란의 2차 침입

천추태후와 김치양 왕위 찬탈 노리고 서북면도순검사 강조가 김치양 일파 제거, 목종 폐위되었습니다. 거란은 목종의 폐위 문제를 둘러싸고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친히 40만을 이끌고 재침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책봉한 국왕을 이유 없이 폐위 했기 때문에 그걸 명분으로 삼아 침입했습니다. 그렇게 강조를 붙잡아서 살해한 다음에 개경까지 함락을 합니다. 그렇게 고려는 하공진이라고 하는 신하를 상대 군영에 보내서 화친을 제의하고 현종이 직접 거란의 수도로 들어가겠다라는 조건을 건 다음에 군사를 물립니다. 이 때 양규라는 사람이 거란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얻기도 합니다. 이 때 양국은 모두 이 때 큰 피해를 입고 관계는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로 끝납니다.

거란의 3차 침입

거란은 고려가 약속한 현종의 친조 요구를 하게 되고 고려는 전공지를 보내 현종의 칭병을 들어 거절의 뜻을 보내게 됩니다. 또한 강동6주의 반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양국 사이 긴장된 분위기가 고조됩니다. 그렇게 수차례의 소규모 공격을 하다가 현종 9년에 소배압이 10만군의 거란을 이끌고 공세를 합니다. 이 공세는 개경 근처까지 진격하다가 퇴각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으로 대패하게 되고 이후로 화친을 성립하고 이후로는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3차 침입 때 귀주대첩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

관련사료

1. 태조의 강경책을 보일 수 있는 사료입니다. 만부교 사건이라고도 불립니다.

[관련사료] 태조의 거란에 대한 강경책
거란(契丹)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선사했다. 왕은 거란이 과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켜 버린 것을 볼 때 이는 매우 무도한 나라로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한 나라가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두어 다 굶어죽게 했다.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25년 10월]

2.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에 대한 관련 사료입니다.

[관련 사료]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소손녕이 서희를 이렇게 을렀다.“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략하여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나라를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朝聘)을 잘한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자 서희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니,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鴨綠江)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나의 말을 천자께 전달해 준다면 천자께서 애절하게 여겨 받아들이실 것이다.” 그 말투가 강개하여 소손녕도 억지를 부릴 수 없음을 알고 자기 조정에 그대로 보고했다. 그러자 거란의 황제도, 고려가 이미 강화를 요청해왔으니 군사 행동을 중지하라고 지시하였다. 소손녕이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려 하자 서희는, “본국이 비록 잘못한 일은 없다 하더라도, 요나라가 수고스럽게도 군대를 멀리로 출동시켰기에, 우리는 상하 모두가 당황하여 무기를 든 채로 여러 날을 들판에서 지새웠으니, 어찌 차마 잔치를 받고 즐기겠는가?”하며 사양하였다. 소손녕이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났는데 어찌 예의상 서로 즐기는 잔치가 없겠는가?”하며 굳이 청하자 서희가 수락하고 즐겁게 놀다가 잔치를 마쳤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 이레를 머물고 돌아오려 하니 소손녕이 낙타 열 마리, 말 1백 필, 양 1천 두와 비단 5백 필을 선물로 주었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며 강가에 나가 맞이하고, 바로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幣使)로 삼아 거란에 들어가서 요나라 황제를 알현하게 하였다.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