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신정변이 일어난 후(1) 이의방·정중부·경대

무신정변이 일어나서 드디어 무인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무신정변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몇몇의 무인들이 힘을 합쳐서 난을 일으켰지만, 난에 성공하고 나서는 권력은 한 사람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 무신정변의 진행

1.1. 온건세력과 강경세력

무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중심인물은 정중부, 이고, 이의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정중부는 고급장교이고 상당히 난의 명분을 쥐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또 김돈중으로부터 모욕적인 행위를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중부가 난에 나섰을 때 많은 무인들은 정중부의 난에 참여하는 상황을 보고 무신정변에 동의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중부는 무신정변 자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온건한 입장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체제 자체를 완전히 변역시키기보다는 몇몇 무인들을 문인들을 제거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난을 실제적으로 주도하고 이끌어 간 사람은 이의방과 이고라고 하는 젊은 장교 그룹이었습니다. 이들은 상위 장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난에 실패했을 때는 집안전체가 망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강경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의방과 이고는 정중부를 끌어들여서 난을 일으키고 일반 무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난이 성공하게 됩니다.

1.2. 이의방의 집권

그리고 무신정변이 발발하자 실제 권력은 이의방과 이고가 차지하게 됩니다. 이 때 정중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의방의 세력에 협조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난이 일어나고 1년 만에 이의방이 자기와 함께 난을 일으켰던 이고를 제거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이의방이 독자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물론 온건한 무장 세력과 타협을 하고 주로 중방을 중심으로 국정을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이의방은 자기가 관직이 높지 않고, 고려 조정내에 세력이 없기 때문에 왕실의 권위를 이용해서 자기 지위를 높이려고 했습니다. 그 방법이 자기가 왕실의 가족이 되는 방법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 뒤 자기의 딸이 태자비가 되는 과정 속에서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국정을 함부로 하여, 정중부와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이의방은 물론 무신정변을 통해서 집권을 했지만 궁극적으로 왕실의 권위에 힘입어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실의 권위 유지 자체가 다른 무인들에게는 “난을 일으킬지 모른다.” “왕을 없앨지 모른다”라고 하는 불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반 무신정변이었던 조위총 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중부 아들 정균이라는 사람이 이의방을 제거함으로써 이의방, 이고의 권력 기간은 짧게 끝나게 됩니다.

1.3. 정중부의 정권 장악

그 뒤 정중부가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정중부는 상당히 고위 무반이었고 일부 문신들과는 사이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정중부는 무신정변 직후 인사이동에서 수상인 문하시중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측근들을 주요 요직에 배치해서 권력을 강화시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이 집중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와중에 이의방과 이고가 제거 된 뒤 중방을 비롯한 고위 무반들이 권력을 독점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의방과 이고와 같은 중간 정도 되는 간부들은 상당히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급 무신과 고급 무신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또 다시 자기들의 가문의 지위를 높이고, 왕실의 권위를 이용해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공주에게 장가를 들려고 시도합니다. 이 때문 경대승은 견룡牽龍 허승과 사사死士 30여 인을 동원하여 단숨에 정균을 제거함으로써 정중부 일파는 권좌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여기까지 정리하자면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나서 이의방, 이고가 권력을 잡고 이고는 다시 이의방에 의해서 제거되고, 이의방은 정중부의 아들 이정균에 의해서 또 제거가 되고, 정중부와 정균은 다시 경대승에 이해서 제거가 됩니다.


[참고사료] 정중부
정중부는 해주(海州 :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사람이다. 생긴 모습이 헌걸차고 네모진 눈동자에 이마가 넓었다. 피부가 맑고 수염이 아름다운데다 신장이 7척이 넘어 바라보면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하였다. 처음에 주(州)에서 그를 군적(軍籍)에 올려 봉비(封臂)해 개경으로 보냈는데, 재상 최홍재(崔弘宰)가 군사를 선발하던 중 그를 보고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묶은 것을 풀어주며 위로와 격려를 한 후 공학군(控鶴軍)에 충당시켰다. 인종(仁宗)대에는 견룡대정(牽龍隊正) 자리에 올랐다. 섣달 그믐날 나례(儺禮)를 열고 잡기(雜技)를 연회할 때면 왕이 친히 임석해 관람했다. 내시(內侍)와 다방(茶房)과 견룡(牽龍) 등이 서로 뛰면서 즐기고 있는데 당시 신진기예였던 내시(內侍) 김돈중(金敦中)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버렸다. 정중부가 그를 붙잡아 욕을 보이자 김돈중의 부친인 김부식(金富軾)이 노하여 왕에게 알려 그를 매질하려고 했다.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일찍이 상서 김이영(金貽永)의 딸을 꾀어서 처로 삼고는 본처를 구박했으며 절제없이 음욕을 채웠다. 장군 경대승(慶大升)은 평소 정중부의 소행에 울분을 품고 있었으며, 또 정균이 은밀하게 공주에게 장가들려고 획책하고 있었으므로 왕도 또한 근심에 차 있었다. 경대승이 그들을 처치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정균을 죽인 후 금군(禁軍)을 동원해 정중부와 송유인(宋有仁) 및 송유인의 아들인 장군 송군수(宋群秀)를 각각 체포하게 했다. 정중부 등이 변란의 소식을 듣고 민가로 도망해 숨자 모두 체포해 참수하고는 큰 거리에 목을 내거니 온 나라가 크게 기뻐했다.
[『고려사』 권128, 열전41 반역2 정중부]


무신정변 집권기 변화

2. 경대승의 집권

경대승은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26살에 권력을 잡고, 30살에 병사해서 짧은 기간 동안 권력을 유지합니다. 경대승은 음서로 고위직에 나갈 정도로 가문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무신정변에 직접 가담하지도 않았습니다.

2.1. 무인들에 분개한 경대승

즉 무신정변 이후에 무신정변 자체를 반대했다는 흔적은 없지만 무신정변 이후에 무인들이 불법을 자행한다거나, 하급 무인들이 권력을 유지한다거나, 의종을 시해한 사건들에 분개하여 왕조 중심 사고를 갖고있었습니다. 이렇게 무인들의 왕실을 넘보는 행위들에 대해서 분개하여 왕정을 되돌리겠다는 복고復古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참고사료] 경대승의 정중부 제거
9월. 장군(將軍)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鄭仲夫)와 사위 송유인(宋有仁)을 베어 죽였다. 경대승은 평소 정중부가 하는 짓을 분하게 여겼다. 또 그 아들 정균(鄭筠)이 공주에게 장가들기를 몰래 도모하므로 왕이 그것을 근심하였다. 경대승이 열심히 그들을 치려고 했지만 송유인이 두려워 틈을 찾지 못하다가 송유인이 문극겸과 한문준을 내쫓아
크게 인심을 잃고 조정의 신료들이 모두 미워하며 흘겨보자 경대승은 그와 친한 용사(勇士)인 견룡(牽龍) 허승(許升)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고자 하는데 네가 기꺼이 나를 따른다면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허승이 승낙하였다. 경대승이 모의하여 말하기를, “장경회(藏經會)가 끝나는 밤에 숙위군사들은 반드시 모두 피곤하여 잠이 들 것이다. 내가 결사대 30여 인을 화의문(和義門) 밖에 매복시켜 둘 것이니 네가 먼저 안에서 정균을 죽이고 휘파람 소리[嘯聲]로 표시를 하면 내가 복병을 동원하여 호응하겠다.”라고 하였다.

밤 4경[四鼓] 허승이 정균이 직려(直廬)에 들어가자 그를 죽이고 바로 길게 휘파람을 부니 경대승이 결사대를 이끌고 궁궐 담을 넘어 들어와 대장군(大將軍) 이경백과 지유(指諭) 문공려(文公呂)를 죽이고 보이는 대로 다 죽이니 궁궐 안이 부르짖고 소란스러웠고, 칼날이 서로 부딪쳤다. 왕이 몹시 놀라 충격을 받으니 경대승이 어실(御室) 밖으로 가서 큰 소리로 아뢰기를 “신들은 사직(社稷)을 호위하려는 것이니 청하건대 임금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나와 궁문(宮門)에 거둥하여 경대승 등을 불러 손수 잔술[巵酒]을 주며 위로하였다. 경대승이 금군(禁軍)을 동원하여 나누어 보내 정중부와 송유인 부자를 체포하기를 청하였다. 정중부 등은 변란이 일어난 것을 듣고 도망쳐 민가(民家)에 숨었으나 모두 사로잡아 베어 죽이고 머리를 저자거리에 효시(梟示)하니 중앙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2.2. 권력을 잡은 경대승

경대승은 그렇게 복고의 뜻을 가지고 있고, 문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급 무인들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경대승은 권력을 잡은 이후로 문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경대승은 자신의 출신배경과 정중부에 대한 살해행위는 많은 무신들을 적대 세력으로 안게 됩니다. 그 이후 경대승은 자기 신변을 보호 해야하는 필요성을 느꼇습니다. 그리고 백수십명의 결사대를 모아 사병조직인 도방都房을 설치합니다.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중방에 의해서 유지되던 무인정권이 사병집단 즉, 도방에 의해서 유지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이후로 최충헌 정권에 들어서면 도방의 최고 책임자가 무인 집정자가 되는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1183년(명종 13년) 7월에 병사病死하여 정권이 무너지고 도방도 해체되게 됩니다.


[참고사료] 경대승의 정치적 성격
왕이 경대승 등을 불러 물어보기를, “지금 정균이 맡았던 승선(承宣)의 직임을 장군에게 제수하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경대승이 아뢰기를, “신은 문자를 알지 못하니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공이 아니면 장차 누가 좋겠는가. 이부시랑(吏部侍郞) 오광척(吳光陟)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아뢰기를, “승선(承宣)은 왕명을 출납하니 유자(儒者)가 아니면 안 되며, 오광척은 비록 문자를 조금 이해하기는 하나 무신(武臣)이오니 아마도 정균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이 없었다. 이에 경대승은 오광척이 반드시 승선에 제수될 것으로 알고 그를 미워하였다. 경대승의 족형(族兄)인 장군(將軍) 손석(孫碩)이 평소 오광척과 원한이 있었으므로 경대승을 꾀어 함께 오광척을 죽여버리고 마침내 네 집의 당여[四家之黨] 장군(將軍) 김광영(金光英), 지유(指諭) 석화(石和)·습련(襲連), 중랑장(中郞將) 송득수(宋得秀)·기세정(奇世貞) 등을 사로잡아 죽이니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궁궐에 와 축하하였다. 경대승이 말하기를, “임금을 시해한 자가 아직 살아 있는데 어찌 축하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의민(李義旼)이 이것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나중에 어떤 무관이 선언(宣言)하여 말하기를 “정시중(鄭侍中)이 대의(大義)를 제일 먼저 주창하여 문신을 꺾어 누르고 여러 해에 걸친 우리들의 분함을 씻어 주었으니 공이 더할 수 없이 크다. 지금 경대승이 하루아침에 4공(公)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칠 것인가.”라고 하였다. 경대승은 두려워하여 결사대 백 수십 명을 불러서 오게 하여 문하에 두고 기르면서 도방(都房)이라 부르며 대비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辭職)하고 집에 거했으나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가 결정에 관여하였다.
[『고려사절요』 권12, 명종 9년 9월]


1170년에 무신정변이 일어난 후1183년까지 13년동안 3번의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무신정변의 초반에는 집권이 안정화 되지 않아 자주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대승의 사후 이의민이 들어오며 상대적으로 긴 집권기를 가지게 되는 무신정변의 시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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