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11대의 왕 문종(文宗)에 대하여

문종(文宗)은 고려시대의 전성기를 이끈 국왕입니다. 또한 고려와 조선의 시기를 합쳐서 태평성대라는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문종의 시대에서는 태평성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려시대의 전성기를 이끈 국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종 그는 누구인가

문종은 11대 국왕입니다. 1019년에 태어났고 고려가 건국된 지 100년 남짓할 때 태어났습니다. 왕위로 재위한 기간은 1046년부터 83년까지 36년 동안입니다. 문종이 재위하게 된 시점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지 110여 년이 지났을 때죠. 그러니까 한 국가가 건국되고 10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정기 그리고 성종 때의 국가 체재 정비를 통해 전성기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 연구자들이 문종의 시기에서 고려시대의 전성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문종은 부인이 5명이었고, 자녀가 20명이었습니다. 또한 자녀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후계구도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후에 후계구도 상에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조짐이기도 합니다. 그게 바로 숙종의 즉위 문제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는 다음의 포스팅에서 확인해주세요

문종의 정책과 통치

고려 사회는 농업을 통해서 생산을 하고 관리들이 농토에서 세금을 받고 국가에 복무하고 그 다음에 상인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국가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서 사회가 유지되었습니다.

토지제도

그래서 선비는 국가를 통치하고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았습니다. 그 것이 바로 토지제도이고 고려사회에는 전시과 제도라고 하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전시과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계혹 변화를 하게 되는데 문종30년(1076)에는 고려의 관료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전시과가 최종적으로 수정되었습니다. 녹봉제도가 정리되었다. 전시과를 맨 처음에 만든것은 경종입니다. 시정전시과(경종 1, 976)라고 알려져있고, 그 뒤 목종이 개정전시과(목종 1,998)로 바뀌게 되고 문종에 와서 경정전시과가 되었습니다. 또한 관리들에게 국가복무 대가로 쌀을 현물로 지급하는 녹봉 제도를 제정하였습니다. 또한 후비·종실, 문·무반, 권무관·동궁관·서경관 외에 서리·공장 등 녹봉 지급하였습니다.

[관련사료] 문종 30년 경정전시과 규정
문종 30년(1076). 양반에게 지급하는 전시과 규정을 다시 고쳐 정했다.
제1과 전지 100결, 시지 50결.【중서령(中書令), 상서령(尙書令), 문하시중(門下侍中).】
제2과 전지 90결 시지 45결.【문하시랑(門下侍郞), 중서시랑(中書侍郞).】
제3과 전지 85결 시지 40결.【참지정사(叅知政事), 좌·우복야(左右僕射), 상장군(上將軍).】
제4과 전지 80결 시지 35결.【6부의 상서들[六尙書], 어사대부(御史大夫), 좌·우상시(左右
常侍), 태자첨사(太子詹事), 태자빈객(太子賓客), 대장군(大將軍).】
(중략)
제18과 전지 17결.【한인(閑人), 잡류(雜類).】
[『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시과]

가장 높은 관직에 있는 관직인 전지 100결은 토지 100결을 준 것이 아닌 토지 100 결에 대한 징세권을 주었습니다. 시지라는 것은 떌나무라거나 혹은 땅을 개간할 수 있는 산 일부라고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총 18과까지 나누어서 토지를 지급하는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법률체계 정비

또한 문종은 법률체계를 정비를 합니다. 율렁, 법제를 정리하교 교정하였으며, 사형판결에 대해서 3번 심사하는 삼복제를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징방관의 권농을 독려하였습니다. 권농은 농사를 잘 짓게해주는 정책입니다. 또한 자연재해에 의해 피해를 입으면 세금을 면제시켜주는 답헌손실법을 제정합니다. 또한 정치적 안정을 위해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삼아 개경에 머물게 한 선상기입법을 실시하기도 합니다.

◇ 법제 정비 정리

  • 즉위 원년(1047) 착수.
  • 율례律例 자세히 교정·정리, 서산업書算業 교정
    사형 판결 삼복제三覆制 실시
  • 지방 안정책 : 지방관의 권농 독려, 조세 감면, 자모정식법子母停息法 제정
  • 전답의 피해분에 대해 직접 조사를 통해 세금을 면제시키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
  • 국자감 학생들의 재학 연한을 ‘유생 9년, 율생 6년’으로 제한하는 고교법考校法
    (文宗 17, 1063)
  • 정치적 안정을 위해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삼아 개경에 머물게 함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文宗 31, 1077)

불교의 부활

또한 고려 시대 불교는 종교로서 본다는 생활문화로서의 성향, 국가에 의례로서의 그런 모습들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이 고려의 숭불 정책이라던가 불교의 생활화가 가장 높은 단계에 오른 것이 문종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종 때 폐지된 불교의 의식을 부활시켰고 천태종을 개 창하게 되는 토대를 만들게 합니다.

◇ 불교의 흥성 정리

  • 고려의 숭불과 불교의 생활화 최고조로 달함
  • 흥왕사興王寺 건립 : 文宗 10년(1056) 창건, 2,800칸에 달하는 거찰로 발전
  • 연등회, 팔관회 부활
  • 여러 불교의식 절차 정비 : 각종 법회 성행, 보살계 도량 등
  • 의천 : 천태종天台宗 개창, 흥왕사에서 속장경 등 경판 사업 전개
  • 거란·송 등과 불전 교류 : 고려의 화엄학 책 송에 역수출, 거란대장경의 유입 등
  • 文宗 13년(1059) 한 집에 3子 중 1子는 15세 때 승려가 되도록 허락하는 법 제정

유학의 발전과 사학 12도 성립

고려시대 과거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과거 달리 말하면 시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학은 현재의 학원과 같이 과거시험 문제를 출제한 경험이 있는 좌주, 지공거 같은 사람들이 일종의 사숙학원을 만들어 과거에 관한 준비를 하게 되어 사학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그렇게 된 결과로 우리나라 사립학교의 시초인 최충의 구재학당이 마련되게 됩니다. 그렇게 12개의 대표적인 사학이 만들어지게 되고 국가기관인 국자감은 쇠퇴하게 됩니다.

◇ 유학의 발전과 사학私學 12도 성립

  •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 마련(文宗 9, 1055)
    우리나라 사립학교의 시초
  • 사학私學 12도 부진한 관학을 압도, 개경에만 11개의 유명한 사학 설립
  • 국자감 직제 강화 문종 17년(1063). 학관의 책임 논하고 학도의 성적에 따라 진퇴를 정하라는 규제가 내려졌으며 관계 교관의 직품이 제정

대외문물교류 및 왕권의 안정화

또한 고려시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만큼 대외교류 관계가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대외문물 교류

  • 송과의 관계 재개 : 거란(요)와의 관계 속에서 송과 외교 단절상태에서 즉위 25년(1071) 김제金悌 등을 송에 보내어 국교를 재개
  • 여송간의 공사公私 사행과 상인 왕래 활발 : 당악唐樂 유입, 객관客官 설치, 송 관료 귀화 등
  • 거란과의 국경 문제 : 지계심정地界審定 문제, 각장榷場 설치 문제 등
  • 여진과의 긴밀한 관계 : 여진의 내부來附 활발

◇ 왕권의 안정화

  • 국왕의 국정 운영을 통해 국왕의 위상 강화
  • 국가와 왕실의 위엄 강화 : 문종 6년 사직단 신축
  • 왕실 봉작제의 정착, 태자 첨사부의 직제 강화

문종에 대한 평가

문종이 고려시대 전성기를 이끈 국왕이다 하는 것은 이제현의 평가를 통해서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제현은 이제현은 고려후기 정당문학, 판삼사사, 정승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문입니다.

[관련사료] 문종에 대한 이제현의 평가

  • 현종(顯宗)·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형이 동생에게 왕위를 잇게 함으로써 근 80년 동안 국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 또한 근면과 검약을 실천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가능한 한 관대한 형벌을 부과했고, 학문을 숭상하며 노인을 공경했다.
  • 자격 없는 자에게 관직[名器]을 맡기지 않았으며,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고[近昵] 실권을 주지 않았다.
  • 아무리 가까운 인친일지라도 공로가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고, 측근의 아끼는 신하라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내렸다.
  • 환관과 급사의 수가 10여 명에 불과하고 내시(內侍)는 반드시 공로와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임명했는데 이 또한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쓸모없는 관리가 줄어 일이 간편해졌으며,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다.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계속 쌓이고 모든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찬양했다.

[『고려사』 권8, 세가8 문종 37년]

고려 조선 시기를 거쳐서 역사 기록에 태평성대라고 표현된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문종은 전성기를 이뤘다라고 표현을 받고 있기 때문에 고려의 시스템, 즉 체제를 정비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라고 알려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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