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신정변이 일어난 후(2) 이의민

1170년의 무신정변 이후 경대승을 포함하여 3번의 집권기가 바뀌고 경대승 사후 이의민이 집권을 하게됩니다. 오늘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겠습니다.

1. 이의민의 집권

이렇게 복고 뜻을 가지고 무신난에 참여하지도 않고 무신들과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경대승이 갑자기 병사를 하고 나자 명종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으로 권력을 잡고 자기 자신의 왕위를 지켜줄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 중 이의민이라는 사람이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때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무신정변의-변천과-권력기구_이의민

1.1. 출세를 하였지만 낙향을 한 이의민

이의민은 경주인으로, 본래 어머니가 사비寺婢인 천계賤係 출신으로 경주 안찰사 김자양에 의해서 격구를 잘하는 인물로 의종에게 나아가게 되고, 의종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1173년(명종 3년)에 일어난 정중부의 집권에 반발에 의종의 복위 운동을 일으킨 김보당의 난을 진압하고 의종을 잔혹하게 시해합니다. 이 공으로 공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됩니다. 그 뒤 1174년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의 난 때에는 정동대장군 지병마사(征東大將軍知兵馬事)가 되어 토벌했고, 그 공으로 무반의 최고직인 상장군(上將軍)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대승은 이의민을 아주 그릇된 신하로 봤습니다. 그 이유는 복고 뜻을 강조하는 경대승 입장에서는 의종을 살해하였으니 눈엣가시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뒤 이의민은 하급 장교로서 무신난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공을 세웠지만 복고의 뜻을 가진 경대승이 권력을 잡게되자 1181년 자기 고향 경주로 낙향을 합니다.

1.2. 명종의 부름

그런데 경대승이 죽고 나니 명종입장에선 무인들을 강력하게 장악을 하면서 왕실을 보존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의민을 불러들입니다. 당시 명종의 입장에는 왕실을 유지만 하면 되고 자기의 왕위를 보존만 시켜준다면 안정적인 무인정권이 유지되는 것이 자기에게 훨씬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의민 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1.3. 이의민 정권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경대승이 사망하자 무신집정의 자리에 올라 1184년(명종 14년) 정월부터 1196년(명종 26년)까지 약 12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의 지위에 올라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의민의 아들도 아버지의 세도를 믿고 횡포를 하여 크게 인심을 잃게 됩니다. 또한 이 정권을 주도해 나간 이들은 최세보, 박순필, 이지명 등 무신란에 적극적이었던 무인들이며 이런 사람들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고 어떻게 보면 경륜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예로 최세보 같은 경우는 수국사 역사를 편찬하는 동수국사(同修國史)의 자리에 올랐는데 글자를 모르는 최세보가 수국사의 자리에 오르니 세상은 이를 조롱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문이라던가 족망을 중시한 정치세력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 민심을 얻는데 성공을 했다면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큰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어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부패하고 당시의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데만 그치게 됩니다.

1.4. 이의민의 추락

이는 개인의 용력이 중시되는 사회 분위기와 그 사회 분위기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괴리가 발생합니다. 또한 막대한 권력을 기반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수탈했으며, 가족들 역시 탐학을 자행했는데 두 아들 이지영과 이지광은 아버지의 세도를 믿고 큰 횡포를 부려 항간에서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렸습니다. 그렇게 횡포를 부리다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집비둘기를 뺏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의민 집권 이후로 무신정변 이후에 행동 집단이었던 무인들인 천계, 하급 신분층이 대거 진출한 상태에서 중간 이상의 간부들은 불만을 가졌었습니다.이런 중간 이상의 무인 세력들의 불만을 최충헌 형제가 모아, 비둘기를 뺏은 사건을 계기로 1196년(명종 26년) 이의민 부자를 제거함으로써 최충헌 시대가 오게 됩니다. 최충헌은 그 이후로 4대에 걸쳐 60년간 권력을 유지하게 됩니다.

1.5. 이의민에 대한 두가지 관점

그 뒤 이의민 정권에 대해서는 두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의민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고 완전히 개인의 용력 즉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권력의 권좌에 올랐다. 그러니 고려 시대에 개인의 힘이 발휘돼서 권력을 장악한 최초의 인물이다. 라는 입장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 불의하고 부패한 세력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나갈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좋게 평가하기가 어렵다. 라는 시각이있습니다. 당시 그가 어떤 용력에 의해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료를 소개하겠습니다.


[관련 사료]
어느 날 이의민이 두경승과 함께 중서성에 있으면서 자랑하기를 ‘어떤 사람이 용력을 뽐내기에 내가 이와 같이 쳐서 넘어 뜨렸다’ 하고 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움직였다. 그러자 두경승이 ‘언제인가 내가 빈 주먹을 휘두르니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더라’하면서 벽을 치니, 뒷 벽이 무너졌다
(≪高麗史≫권 128, 列傳 41, 李義旼).


즉 이의민과 두경승은 실제적으로 개인의 용력, 무력으로 권좌에 오른 정치권력을 얻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것기 가문의 도움이라던가, 족망에 의해서 진출한 그 이전의 고려 시대 관료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라고 하는 시각을 갖게 한 사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2. 무인정권 성립기 성격

2.1. 무인집정의 확고하지 못한 지위

이의민을 제거하는 과정까지의 무인정권의 모습을 살펴본다면 고려 사회의 성격을 전적으로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고려사회의 큰 획을 짓고 고려의 다른 체제를 가져온 역사적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창기에 권력이 안정되지 못하고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말은 제도적으로 독자적인 집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무인들, 고급 무관의 회의체인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잡게 됩니다. 중방은 2군 6위의 정·부 지휘관인 상장군, 대장군 계 16명이 모여 군사문제 논의하는 기구 였습니다. 또한 이는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국왕의 권위를 빌려 권력을 장악 하려고 하여 무인집정 지위의 한계성을 지니게 됩니다.

2.2. 사병 조직의 부재

이전의 이의방, 이고, 정중부의 집정자들이 짧은 기간 동안 권력을 유지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독자적인 사병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문객, 가동 또는 사사, 용사 등으로 불리는 사병적 성격의 무력 소유를 하였으나, 이는 공병과 사병이 합쳐진것으로 계속적·조직적인 면에서 한계성이 존재하였습니다. 조직적인 사병의 미비는 당시 무신정권의 미숙성을 볼 수 있는 측면

2.3. 문반에 대한 심한 탄압

무인정권 초창기의 성격은 ‘무릇 문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라는 말이 있듯이 문반에 대해서 심한 탄압과 적대적인 관계로, 많은 문신 학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무신들은 양반 제도 하에서 문신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에 문반직을 두긴 하지만, 많은 자리들은 본인들이 차지합니다. 그러나 무인들은 정치와 행정의 실무에 있어 제약성으로 인해 문신들의 정치 참여는 불가피하였습니다. 그렇게 무신정권은 자신의 필요성에 따라 많은 문신들을 등용시켜 이용하였고 동시에 문반에 대한 견제와 탄압 계속하는 한계를 내포하였습니다.

그렇게 무신정권은 무인집정의 확고하지 못한 지위와, 사병조직의 부재, 문반에 대한 심한 탄압으로 정권이 자주 바뀌게 되지만 최충헌이 들어오며 60년간 더 지속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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