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이자겸의 난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12세기 개혁을 주도했던 예종이 죽고 그 아들 인종이 즉위를합니다. 인종이 즉위를 할 당시의 고려사회는 전체적으로 개혁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궁궐 내에서 중앙 정계에서는 예종의 측근 세력인 한안인 세력과 이자겸 세력이 양분해 있는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인종이 즉위를 하고 이자겸이 한안인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자겸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자겸 가문의 배경

인주 이씨인 이자겸의 가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고려 시대의 왕실 족내혼을 취했지만 고려 현종이 거란족의 침입을 받아서 공주지방, 나주까지 쫓겨 가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공주지방에서는 관료들에게 왕다운 대접을 못 받고 국왕의 권위가 실추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공주 안찰사 김은부의 도움을 받아 궁궐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로 인해 현종은 김은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게 되고 서울로 돌아온 이후로는 다른 두 딸마저도 왕비로 맞이하게 됩니다. 현종은 고려의 국왕이지만 지방까지 장악하지 못했고, 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외척을 형성했습니다. 그 뒤 김은부의 사위였던 이자연에 이해서 문종대 세 딸이 납비가 되고 인종 때까지 무려 7대에 걸쳐서 80년간 가장 강력한 외척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인주 이씨가 외척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라고 하는 것은 단순하게 국왕의 가문과 혼인을 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후의 자식들이 왕이 되고 또 그 자식, 그 왕의 동생이 왕이 되는 형제상속의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또한 왕씨 가문 다음으로 좋은 가문이 인주 이씨 가문이 되어 다른 문벌 세력들은 인주 이씨와 혼인을 하려고 하여 혼인이 중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인주 이씨 세력, 가문의 세력은 더 커졌습니다. 인주 이씨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실과의 혼인을 독점하는 것 또 인주 이씨의 자녀들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유리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현상 왕실과의 혼인이 인주 이씨로 독점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또 인주 이씨 가문 출신의 여식한테서 나온 왕자들이 자식으로 물려가는 것이 아니고 형제들끼리 상속을 해서 왕위를 물려받는 왕위계승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왕자와 왕녀 대부분이 인주 이씨의 외손으로 형성되게 됐습니다.

숙종의 인주 이씨 배척과 성장

이런 와정에 숙종이 인주 이씨 이자의 세력을 제거하고 즉위를 하게 됐습니다. 즉위한 다음에 본인은 인주 이씨의 세력과 혼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주 이씨 세력을 권력의 요직에 배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숙종의 아들 예종은 늦은 나이에 왕이 돼서 결혼 후에 아들을 낳고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쯤 아들의 나이가 어릴 것이 가히 짐작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예종은 자기 아들의 왕위세습을 안정적으로 이루기 위해 숙종이 싫어했던 인주 이씨 가문의 이자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이 관계에서 아들이 태어나고 원자가 됨으로써 예종은 왕위를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서는 이자겸의 지위와 권력이 필요하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지위는 갈수록 올라가게 되며 예종대에 성장하기 시작하고 예종이 죽고 난 이후에 급격하게 강화되었습니다.

문종대 이자연의 세 딸이 납비가 됩니다. 그 뒤 순종, 선종으로 형제상속이 되고 헌종에게 왕위가 물려졌지만, 숙종이 헌종을 내몰고 왕이 되었습니다. 숙종은 인주 이씨를 싫어했지만, 본인도 인주 이씨의 외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문종 다음에 이자연의 달이 낳은 순종, 선종, 숙종이 형제상속으로 이어지는 꼴이 됩니다. 13대 선종도 모두 인주 이씨의 딸을 맞이하고 15대 숙종의 아들인 예종도 인주 이씨의 딸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뒤 인종도 이자겸의 딸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자겸의 출신과 정치적 성장

이자겸은 문종의 장인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이자연의 손자이고 상서좌복야를 지낸 이호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해주 최 씨로써 해동공자로 불리는 최충의 손자 최사추의 딸과 혼인을 합니다. 당대 최사추는 문벌 가문들 사이에서는 태산북두와 같은 존재로 불리는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이를 장인으로 삼게 되고, 또 당시 여진정벌 반대론자 중 하나인 김상기의 아들 김인존의 처남이기도 했습니다. 이호의 딸이 문종의 맏아들 순종에게 출가를 합니다. 이로 인해 왕비의 오빠로서 과거를 보지 않고 요직에 진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순종의 비 장경공주가 순종이 죽고 나서 노비와 간통을 하다 발탁이 되어 쫓겨납니다. 그 뒤 관직에서 쫓겨나는 처지에서 예종은 상당히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자겸의 딸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이에서 원자를 낳게 되었고 예종 입장에서는 아들을 왕위세습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예종은 한안인 세력들이 예종의 동생을 왕으로 세워 개혁정치를 이끌어가거나 자기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예종은 원자가 태어난 후로 이자겸의 지위를 강화하게 됩니다.그 뒤 참지정사, 상서좌복야, 문하평장사를 거치며 정치적 성장을 하게 됩니다.

예종의 사후와 인종의 즉위

예종이 말년에 들어가면 갈수록 자신의 개혁정치를 담당하는 한안인 세력들은 끊임없이 이자겸 세력을 탄핵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예종의 동생 대방공을 통해서 왕위를 넘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지게 되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종이 14살의 어린나이로 즉위를 하게 됩니다. 이자겸은 정치적인 멘토로써 성장하게 되고 정적제거를 통해서 권력을 독점하고자 했습니다.

한안인 세력을 몰아낸 이자겸

한안인 세력은 신진세력으로써 숙종 때부터 등장해서 예종대에 예종의 개혁정치, 새로운 정치, 새로운 제도의 구축에 동원된 정치세력으로 불리우게 됩니다. 하지만 한안인 세력이 이자겸 세력에 의해서 제거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것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여섯가지로 나뉘어져있습니다. 그만큼 복잡하고 미묘하다는 것입니다.

<이자겸세력의 한안인세력 제거사건에 대한 견해>
1) 관련자들의 출신배경을 근거로 문벌귀족 대 신진관료 세력의 분열・대립
2) 예종 사후 세력이 강대해진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한안인 세력의 도전에서 비롯된 일
3) 예종대 이래 외척 내지 문벌들의 부당한 정치 간여에 반대한 유신들을 제압하고자 가장 대립적인 세력이었던 한안인・문공미 등을 이자겸 세력이 제거
4) 이자겸 및 그 일파의 문벌귀족 세력이 도전해 오는 지방출신의 신진관료 세력을 제거・추방하려는 정치적 책동
5) 예종~인종대 이자겸 세력과 한안인 세력 두 세력의 대립에서 기인
6) 인종을 추대하려는 이자겸 세력과 대방공 보를 추대하려는 한안인 세력 사이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

이 주장을 일관하는 것은 한안인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세력과 이자겸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고려의 조정을 반분하고 있었고 이것은 예종의 측근세력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종이 살아 있을 때는 이 세력 균형이 유지가 됐지만 예종의 사후 두 세력은 한 쪽으로 힘이 치우칠 수 밖에 없었고 그 세력 간의 갈등에서 이자겸 세력이 성공하게 되었다. 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당시에 이자겸 세력이 한안인 세력을 제거하는 것을 알려주는 사료의 내용을 보도록하겠습니다.

[관련 사료] 이자겸이 인종을 세운 후, 중부(仲父) 대방공(帶方公) 왕보[俌]가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였다. 드디어 문하시랑(門下侍郞) 한교여(韓繳如=한안인), 추밀사(樞密使) 문공미(文公美)와 더불어 반역[不軌]을 도모하고 예부상 서(禮部尙書) 이영(李永), 이부시랑(吏部侍郞) 정극영(鄭克永), 병부시랑 (兵部侍郞) 임존(林存) 등 10여 인이 내응(內應)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미처 거사하기 전에 陰謀가 누설되어 곧바로 사로잡혀 투옥되었다. 이에 이자겸이 왕에게 넌지시 말하여 왕보[俌]를 해도(海島)에 추방하고 여러 악인들을 베었으며 잔당(殘黨) 수백 인을 잡아들였다. 이 때문에 변란을 안정시킨 공으로써 태사(太師)에 책봉되었고 식읍(食邑)과 채지(采地)를 더 주었으며 지위가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고려도경』 권8, 인물 이자겸]

해석하자면 이자겸이 인종을 세운 뒤에 대방고 왕보가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였다.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은 이자겸 열전에 기록돼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자겸의 입장에서 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문하시랑 한교여는 한안인을 뜻합니다. 한안인과 문공미와 더불어 반역을 도모하고 예부상서 이영, 정극영 임존 등 10여인이 이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하기 전에 계획 누설되어 사로잡혀 투옥되었다. 그래서 이자겸이 왕에게 말하여 예종의 동생인 왕보, 인종 입장으로는 자기 삼촌을 해도로 추방하고 여러 악인은 베었으며 잔당 수백 명을 잡아들였다. 그래서 이 변란은 안정시킨 공으로 자겸은 태사에 책봉되고 식읍과 채지를 받게 되고 지위가 상서령에 이르렀다고 하는 고려도경 서궁의 입장에서 써진 이자겸의 기록입니다. 서궁은 고려 사람으로서 당시 이자겸이 가장 높은 지위에 있을 때 고려를 방문한 사람이기 때문에 제거된 한안인의 입장보다는 이 사건을 승리로 이끈 이자겸의 입장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한안인 세력이 대방공 왕보를 내세워서 왕위를 탈취하려는 반역사건으로 본 것입니다.

이자겸의 권력 독점

한안인 세력이 제거되고 나서 고려사에 관련된 일부 기록에 의하면 궁궐의 절반이 텅 비었다.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조정은 이자겸 세력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자겸은 공신호, 한양공이라고 하는 것을 책봉하게 되고 나중에는 조선국공을 받게 됩니다. 또한 숭덕부(崇德府) 설치합니다. 부府라고 하는 것은 왕자나 왕비에게 설치하는 관부인데 자신이 그 지휘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로 만듭니다. 생일을 절로 부르는 것도 국왕과 관련된 사람에게만 절로 부를 수 있지만, 자신의 생일을 절로 칭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김부식이 예의에 맞지 않다는 비판을 하고 그러면서 중앙 정계를 개편합니다. 또한 본인의 지위를 더 강하게 하기 위해 셋째 딸,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들여 국왕의 외조부이면서 장인이라는 이중적인 신분을 확보하고 왕권을 능가하는 실세로 오르게 됩니다. 그 뒤 뇌물을 받고 권력을 남용하게 됩니다. 세력의 부패나 진행을 알려주는 사료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관련 사료] 이자겸의 전횡-1
・ 곧 이어 이자겸은 한양공(漢陽公)으로 책봉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의 모친은 평장사(平章事) 김정준(金廷俊)의 딸로 성품이 탐욕스러워 상인으로부터 물건을 강제로 사들이면서 때로는 전혀 값을 지불하지도 않 았으며 또 노비를 시켜 횡포를 부리게 했으니,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상인들이 서로 축하할 정도였다.
・ 이자겸이 다른 가문에서 왕비가 나와 권세와 총애가 줄어들까 우려한 나머지 셋째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라고 강요하자 왕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 이날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리고 나무가 뽑히었다. 그 후 다시 넷째 딸을 왕비로 들이니 또 크게 비바람이 일었다.
・ 이자겸이 개인적으로 자기 부(府)의 주부(注簿) 소세청(蘇世淸)을 송나라로 보내 표문을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며 스스로를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칭했다. 이자겸의 권세와 총애가 나날이 융성해져 자신에게 빌붙지 않는 자가 있으면 온 갖 계략으로 중상했다.
・ 자신의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시키고 관작을 팔아 자기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 어두었다. 스스로 국공(國公)에 올라 왕태자(王太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 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고 중앙과 지방에서는 올리는 축하의 글을 임금과 동등하게 전(箋)이라 불렀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 다 이어 있었으며, 세력이 더욱 뻗치니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 물이 모여들어 늘 수 만근의 고기가 썩어났다. 남의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 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자기의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모두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팔아 치우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 또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려고 왕에게 요청해 자신의 집에 와서 책봉하게 했으며 시간까지 강제로 정하였다. 그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그 후로 왕 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게 되었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이자겸]

이런 기록으로 볼 때 고려사횡에서 김은부라던가 이자연 외척들이 수업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전한 지위를 누렸는데 이자겸만 왜 쫓겨났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을것입니다.

인종의 이자겸 견제

이자겸의 권력의 부패와 독점 때문에 인종이 멀리하게 됩니다. 인종의 측근들은 이자겸이 없어야만 자신들의 지위가 올라가기 때문에 국왕의 측근인 내시 김찬과 안보린 들이 장군들을 불러 계획을 세웁니다. 인종 4년 인종이 18살이 되었을 때 이자겸의 측근인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을 제거하고 이자겸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는 일파를 제거하는 데는 실패하게 되고 척준경이 나서게 됩니다. 또한 현화사에 주지로 있는 이자겸의 아들 의장이라는 사람이 현화사 삼백 명을 이끌고 와서 궁궐을 포위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와중에 척중경이 궁궐을 불살라 버리고 계획의 주모자들 오탁·최탁 등을 제거하고 지녹연·김찬등을 유배 보내버립니다. 따라서 이자겸을 제거하려는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궁궐 대부분이 소실되는 결과로 끝나게 됩니다.

척준경과 이자겸의 난

이와중에 이자겸은 측근 무장 세력 척준경과 불화를 겪게 됩니다. 이자겸은 척준경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혼인관계를 맺었지만 그 아들 이지언과 척준경의 종 사이의 싸움이 일어나서 반목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흥미로운 사료를 보겠습니다.

[관련 사료]
마침 이지언(李之彦)의 종이 척준경의 종더러, “너의 주인은 저위(宁位) 에 활을 쏘고 궁궐을 불태웠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너 또한 마땅히 관노(官奴)로 적몰되어야 마땅한데 어찌 나에게 모욕을 주느냐?”고 욕 질을 했다. 척준경이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이자겸의 집으로 달려 가 옷 과 관을 벗고, “내 죄가 크니 해당 관청에 나가 스스로 밝히겠소.”라고 말한 후 뒤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사람들이 말렸으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 들어 누워버렸다. 이자겸(李資謙)이 이지미와 이공의(李公儀)를 보내어 화해를 청하였으나 척준경(拓俊京)은, “당시의 난리는 모두 너희 들이 한 짓인데 어찌 나의 죄만 죽어 마땅하다고 하느냐?”라고 꾸짖으며 끝내 보지 않았다. 그리고는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사람 들에게 말했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이자겸]

이런 와중 최사전과 정지상 들이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척준경이 군사를 동원해서 그 일파를 잡아들이게 됩니다. 그 뒤 이자겸과 그의 아내 최씨, 아들 이지윤을 영광에 귀양보내고 셋째・넷째 딸들도 모두 폐비가 되게 됩니다. 이자겸은 1126년 12월 유배지 영광에서 사망하게 되고 척준경은 공신으로 책봉되어 한동안 권력을 잡았다가 1127년 3월 좌정언 정지상 등으로부터 탄핵받아 엄타도嚴墮島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1144년 사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궐이 소실되고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습니다. 이는 정치 질서 문란, 문벌귀족들 사이의 분열 · 대립 표면화된 사건이었으며 문벌귀족 사회의 동료를 가져오게됩니다.

이자겸의난 이후 불타게 된 개경의 궁궐이. 이것이 개경의 지덕이 다했으니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서경천도운동으로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종의 즉위와 이자겸의 반란은 뒤엉어서 묘청의 난과 연결이 됩니다. 이로인해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는 상황으로 연결돼서 인종의 아들 의종 때에는 무신난이 일어나는 일련의 계기가 됩니다.

궁극적으로 이자겸은 제거되게 됩니다. 이자겸은 본인 스스로가 타락하고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좋아하여 제거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의 외척으로써 권력을 유지한 사람들이 선대에 많이 있었는데 이자겸만 반란을 통해서 제거된 것을 보면 왕권이 그만큼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라는 점도 있지만 이자겸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그 이전의 외척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라고 볼 수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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