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과 소련군이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에서 벌인 가장 크고 잔인한 도시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이 전투는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의 일환으로, 소련의 석유 공급원을 점거하고 볼가 강을 통제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는 소련의 산업 중심지이자 스탈린 지도자의 이름을 딴 도시였기 때문에, 양측 모두 이 전투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 전투 개요

1.1 “전투의 역사적 배경”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크고 잔인한 도시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이 전투는 1942년 8월 23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약 5개월 동안 소련의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는 독일군과 소련군이 동유럽의 지배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운 동부 전선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발생한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었던 시기였습니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은 소련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은 실패하였지만 독일군은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발트해 공화국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서부 전선에서는 독일은 대부분의 유럽을 장악했고, 대서양에서의 U-보트 공세는 미국의 지원을 막았습니다. 또한 북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 국경주변 토브룩을 점령하던 차였습니다.

1942년 여름, 독일군은 소련 남부지역의 전선의 안정화를 추구하였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주변 도시의 산업 능력을 파괴하였습니다. 또한 도시가 볼가강의 큰 굽이 근처에 전략적으로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코카서스(Caucasus)와 카스피해(Caspian)를 러시아 중부로 연결하는 볼가 강의 교통을 차단하여 소련의 보급선을 차단하고자 하였습니다.

1942년 7월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하려고 목표를 바꿧습니다. 독일과 러시아는 이 도시에 선전적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이름에는 소련 지도자의 이름이 붙어있기 때문에이 도시를 점령하면 독일제국의 이념적 승리가 컸을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소련의 산업 중심지이자 교통 요지였으며, 히틀러는 이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소련의 사기를 꺾고, 스탈린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습니다.

소련 측에서는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후퇴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나치에게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소련군은 볼가 강 건너에 있는 스탈린그라드로 계속해서 보급과 병력을 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배와 인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건물과 공장, 거리와 지하도를 무대로 한 치열한 근접전이 벌어졌습니다.

1.2 “전투 참가국과 지휘자”

– 독일: 독일 제3국가와 그 동맹국인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독일 제6군과 제4전차군으로 구성된 B군단에 속했습니다. B군단의 최고 지휘권은 막시밀리안 폰 바이히스 장군이 맡았습니다. 또한 A집단군과 B집단군의 경계를 위해 창설된 Don 집단군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사령관의 지휘를 따랐습니다.

– 소련: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방어를 위해 남서부전선, 스탈린그라드 전선, 동부전선 등 여러 전선을 편성했다. 이들은 주로 제62군과 제64군으로 구성되었다. 소련의 최고 지휘권은 조세프 스탈린이 맡았습니다.

종류독일소련
인원270,000명 187,000명
대포3,000개2,200개
탱크500대400대
항공기9월 중순까지 1,600대300대

2. 전투 진행과 전략

2.1 “전투 시작과 초기 전략”

8월 23일, 제6군은 도시로 후퇴한 제62군과 제64군을 추격하기 위해 스탈린그라드 외곽에 도착했습니다.  소련은 독일군이 곡물, 가축, 철도 차량을 위험하지 않은 곳으로 볼가 강을 건너 수송할 것이라는 경고를 충분히 받았지만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에 거주하는 40만 명의 민간인을 대피시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독일군이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루프트바페 독일 공군이 도시로 오는 보급품을 운반하는데 필수적인 선박을 파괴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소련 선박 32척이 침몰했고, 9척이 파손되었습니다.

전투는 루프트바페가 도시를 폭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48시간 만에 약 1,000톤의 폭탄이 투하되었는데, 이는 공습이 한창일 때 런던에서 투하된 것보다 더 많은 수치라고 합니다. 이 폭격으로 인해 도시 주택의 최소 90%가 사라졌습니다. 스탈린은 가능한 모든 군대를 볼가 강 동쪽 기슭으로 돌진했으며, 일부는 멀리 시베리아 까지 파견되었습니다. 또한 민간인의 존재가 도시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격려를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민간인이 도시를 떠나는 것을 막았다고 합니다.

소련공군은 독일공군 루프트바페에 의해 휩쓸려 갔습니다. 인근 소련공군 기지는 8월 23일부터 31일 사이에 201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8월에 약 100대의 항공기가 빈약하게 증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전 가능한 항공기는 192대만이 남았으며 그 중 57대는 전투기였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9월 1일까지 포격과 항공지원을 받으며 스탈린그라드에서 병력을 지원하고 공급하는 데 계속 노력했습니다.

9월이 되고 소련군은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지만 독일 공군의 지원으로 소련군은 몇 시간 만에 철수해야 했고 많은 전차가 손실되었습니다. 도시 내에서의 전투는 치열했으며, 건물이 무너진 상황에서 소련군은 시가전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소련군은 탈영군을 방지하기 위해 탈영병을 처형하였고 소련 당국은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후퇴를 지시한 지휘관들을 군사 재판에 넘겼습니다.

독일군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도시를 통과해 전진했습니다. 개별적으로 위치를 잡았으나 독일군은 강둑을 따라 주요 교차점을 점령할 수 없었습니다. 9월 27일 독일군은 도시의 남쪽 부분을 점령했지만 소련군은 도시 중심부와 북쪽 부분을 점령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소련이 볼가강 동쪽 강둑에 있는 보급품의 길목을 통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2.2 “소련의 방어”

스탈린그라드 폐허에서는 독일군의 탱크와 포병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소련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가 “hugging” 전술을 도입했습니다. 또한, 소련군은 공격을 예측하고 막기 위해 정찰 순찰대를 활용하고, 야간 공격과 특수 부대를 사용하여 독일군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전술적 혁신은 전투가 계속됨에 따라 널리 퍼졌습니다.

전투 중에는 건물, 지하실, 하수도 등에서 치열한 근접 전투가 벌어졌으며, 무서운 화염 방사기 등의 무기가 사용되었습니다. 소련군은 건물을 거점으로 삼고 다층 건물에서 방어를 구축했으며, 여성들도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근접전투의 잔인함은 부대가 당한 군사 사상자의 수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제13 근위소총사단은 처음 24시간 동안 30%의 사상자를 냈고, 전투가 끝날 때까지 10,000명 중 320명만이 남았습니다. 건물과 층이 수십 번 바뀌고 승리하는 데 최대 며칠이 걸리기 때문에 소대와 중대는 건물이나 층을 승리하는 데 최대 90%, 심지어 100%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

1942년 9월 27일 이후,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전투는 도시의 북쪽 산업 지역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제51군단은 소련의 강력한 저항에 맞서 천천히 전진하여 붉은 10월 철강공장, 바리카디 무기공장, 스탈린그라드 트랙터공장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공장들은 소련군에 의해 강력하게 방어되었습니다. 특히 바리카디 공장에서의 전투는 10월 말까지 지속되었고, 소련은 몇 개의 작은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바라카디 공장은 이 도시의 강력한 방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3개월 동안의 느린 전진 끝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의 90%를 점령하고 소련군을 두 개의 작은 지역으로 나눴습니다. 볼가 강의 얼음 때문에 보트와 예인선은 소련 수비군에게 공급할 수 없게 되었지만, 전투는 특히 마마예프 쿠르간(Mamaev Kurgan) 경사면과 도시 북부의 공장 지역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독일 6군은 전사 12,782명, 부상 45,545명, 실종 2,221명을 포함한 총 60,548명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3. 결정적인 순간과 전술

3.1 “스탈린그라드 포위 작전”

1942년 겨울 동안, 독일군은 공격 작전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동부 전선 남부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했습니다. 이 상황을 인식한 소련군 1942년 11월 19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약 15개 군대가 참여하는 겨울 전역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혼란에 빠지고 악천후로 인해 효과적인 공중지원이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소련군의 공세에 직면한 독일군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주변을 봉쇄하고, 남쪽에서 루마니아군을 상대로 공세를 시작하여 독일군을 포위했습니다.

포위된 추축군 병력은 독일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 크로아티아인 265,00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독일 공군인 루프트바페는 공급 공중 교량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제한된 수의 항공기와 인프라, 그리고 독일 병력의 크기와 필요한 보급품 양에 비해 부족한 상황에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결국, 필요한 보급품 양을 전달하지 못하였고 독일군은 굶주리며 약화되었습니다. 210,000명의 독일군 중 10,000명이 전투에 남았고 105,000명이 항복했으며 35,000명은 항공으로 남겨졌고 나머지 60,000명은 사망했습니다.

12월 23일, 스탈린그라드 구원 시도는 포기되었고 독일군은 방어 태세로 전환했습니다. 나치 독일의 목표는 소련군을 묶어두고 다른 전선에서 반격을 어느 정도 견제하기 위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싸우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3.2 “독일군의 포기”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독일군은 굶주림과 탄약 부족으로 고통받았지만 여전히 저항을 했습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항복하는 사람은 누구든 처형할 것이라는 루머로 인해 무장 저항이 높았습니다. 독일군은 창문에 철망을 고정하고, 소련군은 수류탄에 낚싯바늘을 고정해 대응했습니다.

1943년 1월 22일, 돈 전선 총사령관 로코솝스키는 다시 한번 독일 제 6군 사령관 파울루스에게 항복할 기회를 제공했으나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거부로 인해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승진시키고 계속해서 싸우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월 26일에는 스탈린그라드 내부의 독일군이 무너지며 북쪽과 남쪽으로 나눠졌습니다. 파울루스는 자신이 항복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독일 최고사령부와 소련군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2월 2일, 중앙 주머니의 독일군도 항복하였고, 북쪽 주머니는 몇 일 동안 저항을 했지만 마침내 스트레커 장군이 항복했습니다. 약 91,000명의 독일군이 포로로 잡혔고, 히틀러는 분노하여 파울루스가 모스크바로 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4. 전쟁 후 결과

4.1 나치정부가 인정한 첫 패배

1943년 1월 말까지 독일 대중은 스탈린그라드의 재난 상황을 공식적으로 알지 못했으나 긍정적인 언론 보도가 중단되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패배는 나치 정부가 처음으로 전쟁 노력의 실패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사례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독일 국영 라디오 프로그램이 바뀌었고 패배가 발표되었습니다. 독일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국민들에게 전체 인구의 모든 자원과 노력을 동원하는 “총력전”을 호소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이 전투가 이미 끝난 후에도 계속 저항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히틀러와 나치 이념에 대한 신념으로 인해 계속 싸우기로 결심한 것으로 추정되며,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신념을 강조했습니다. 독일군과의 접전 중에 민간인들도 희생되었고, 양측은 민간인을 무시한 비인도적인 행동으로 악명을 높였습니다.

전투와 폭격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고, 전투 전 50만 명 이상의 인구 중 전투 후에는 1,515명만 남았습니다. 독일 포로 중 단지 5,000명만이 생존하고 나머지는 병원, 기아, 질병, 학대 등으로 사망했습니다. 일부 고위 장교들은 선전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이주하여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행동을 방어했습니다.

이 전투는 군사적 학살과 민간인 희생으로 악명을 높였으며, 독일과 소련 양측 모두에게 큰 상처를 안겼습니다.

4.2 전쟁의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 역사상 가장 큰 패배로 여겨지며 동부 전선, 독일과의 전쟁 전체,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환점으로 식별됩니다. 이 전투는 1942년 11월 19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겨울 전역으로 진행되었으며, 독일의 대전략 실패와 정보 부족으로 인해 독일군은 분수령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 추축국 군인 중 최대 규모인 사망자, 포로, 부상자 수가 거의 100만 명에 이르며, 독일의 전략적 실패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전투의 결과로 독일의 제6군은 소멸하고 독일의 유럽 동맹군도 궤멸되었습니다. 이로써 독일은 파멸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히틀러는 1944년 11월 9일 연설에서 스탈린그라드를 비난하며 독일의 임박한 파멸을 인정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전체 군대가 파괴되고 독일의 대전략이 실패하면서 스탈린그라드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소련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독일은 사기적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쳐 독일의 패배가 불가피하다고 여겨지게 되었으며, 스탈린은 당대의 영웅으로 인정받았고 소련의 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전 세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전쟁의 전환점으로 여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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