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덩케르크’ : 죽음속에서 생존,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대해서

영화 덩케르크는 2017년 7월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쟁 영화입니다. 덩케르크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어난 프랑스 됭케르크 해안에 연합국 병력을 영국 본토로 탈출시키는 작전인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소재로 하였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영화와 함께 됭케르크 대피 작전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덩케르크 메인 예고편

1: “영화 소개와 배경”

1.1: “덩케르크: 역사적 배경과 중요성”

됭케르크 철수작전은 1940년 5월 28일부터 6월 4일까지 독일군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한 채 프랑스 북부 해안에 고립되어 있던 40만 명의 연합군을 영국 본토로 철수시키는 작전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구출할 수 있는 방법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대형 선박들을 동원했지만, 됭케르크 항구는 비교적 얕은 해안선으로 대형 선박들이 접근하기 어려웠고, 잠수함이 항구 근처까지 다가 올 수 있어 독일군의 잠수함 공격에 취약했습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평지에 있어 독일군의 폭격에 쉽게 노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모든 가능한 작은 선박들을 동원하여 병사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응답하여 수천 명의 일반 시민들이 자신들의 보트, 요트, 낚시배, 페리 등을 운전하여 됭케르크 항구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연합군 병사들을 해안가에서 태우거나, 침몰한 선박에서 구조하여 영국 본토로 안전하게 이송했습니다. 이러한 시민들의 용감한 행동은 ‘작은 배들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연합군의 사기를 높이고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2: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접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인셉션(Inception)’, ‘인터스텔라(Interstellar)’,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등의 자신만의 관점으로 영화를 표현하여 유명한 영화를 만든 명감독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번 ‘덩케르크’ 영화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 시간적 관점 : 일주일, 하루, 한 시간을 병렬적으로 편집하여 그글의 체감시간을 각각 다르게 구현하며, 각 시점에서 전쟁의 참상을 보여줍니다.
    공중 한 시간: 적의 전투기를 공격해 추락시키는 임무, 남은 연료로 비행이 가능한 한 시간,
    해상 하루: 군인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배를 몰고 덩케르크로 항해하는 하루
    육상 일주일: 보이지 않는 적에게 포위된 채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은 동료를 관통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은 동료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위기의 일주일
  • 캐릭터 관점 : ‘덩케르크’에는 다수의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모두 실제 역사적 인물들 또는 실제 영웅적 인물들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영화에는 이름도 없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전쟁의 현실과 긴장감을 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해변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영국 군인 토미(피오니 화이트헤드), 프랑스 군인 지브론(아네린 바르나르), 스코틀랜드 군인 알렉스(해리 스타일스) 등은 서로 다른 배경과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생존이라는 목표를위해 협력하고 갈등하고 희생하고 용기를 보입니다.

2: “됭케르크 철수작전 (Dunkirk Evacuation)의 배경”

2-1: “나치 독일의 공세와 독일군의 진군”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 프랑스와 대영제국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고 경제 봉쇄를 실시했습니다. 이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이후 독일은 1945년 5월 10일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를 침공했습니다. 이 공격은 ‘블리츠크리그‘ 일명 번개전이라고 불리는 빠르고 강력한 전략으로, 공중과 육지에서 동시에 적을 압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는 1930년대에 독일과의 국경을 따라 건설한 마지노선이 있다면 독일군은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수비적인 태세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아르덴을 통해 공격한 후 벨기에의 연합군을 차단하여 연합군은 됭케르크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2-2: “연합군의 절체절명 상황”

덩켈크에서 연합군은 약 40만 명의 군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은 영국 군인이었으며,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폴란드 등 다른 국가의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포위와 공격에 맞서 싸우면서, 해상에서 영국으로 피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됭케르크 항구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사용할 수 없었고, 해변에서는 큰 배들이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연합군은 작은 배들을 이용하여 해변에서 군인들을 태우고 영국으로 운송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됭케르크 철수작전이었습니다.

3: “철수작전의 계획과 진행”

3-1: 5월 26일부터 6월 4일 : 결정적인 10일

5월 24일 작전이 펼쳐지게 4일전 독일군은 볼로뉴 항구(Boulogne marina)를 점령하고 칼레(Calais)를 포위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연합군이 모여있는 덩케르크와 직선거리로 60km 떨어져있었습니다. 독일군의 기갑사단 공병들은 운하 경계선 위에 5개의 다리를 건설했고 단 1개의 영국 대대만이 덩케르크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측면의 취약성과 전방 부대에 대한 보급 문제를 우려하여 기갑 부대에 정지를 명령했습니다.

5월 26일 처칠은 다이나모에게 출발을 명령했고 초기 계획에서는 이틀 이내에 45,000병력을 구출해야 했으며, 독일군은 추가 대피를 차단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이 날 독일 공군은 칼레와 그 주변에서 버티고 있는 연합군 포위망을 장악하기 위해 집중했고, 덩케르크는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 5월26~29일
덩케르크 철수 작전 5월26~29일
출처 : 위키피디아

5월 27일 대피 첫날에는 순양함 1척 , 구축함 8척 , 기타 선박 26척이 활동했습니다. 해군성 장교들은 해변에서 항구에 있는 대형 선박으로 인원을 수송할 수 있는 소형 선박과 부두에서 선적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을 찾기 위해 인근 보트 야드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5월 28일 벨기에 군은 이 날 항복했고, 독일 공군은 덩케르크의 날씨로 다이빙이나 저고도 폭격을 하기에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벨기에의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5월 29일 돌일 공군의 Ju 87이 수송에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약 4만명의 영국군이 구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구축함이 침몰하고 프랑스 구축함이 파손되는 등 여객선, 증기선 마저 파괴되었습니다.

5월 30일~ 6월 4일 53823명, 68014명이 5워 31일 대피해꼬, 추가로 64,429명의 연합군 병사들이 6워 1일에 출발하였고 6워 2~4일의 밤 동안 75,000 명의 프랑스군이 추가로 대피하였습니다. 그러나 작전이 끝나기 전에 나머지 후위대 40,000명의 프랑스군은 6월 4일에 항복하게됩니다.

덩케르크-철수-작전-5월31일
덩케르크 철수 작전 5월31일
출처 : 위키피디아

3-2: 동맹국의 단결과 용기

됭케르크 철수작전은 동맹국의 단결과 용기를 보여주는 사례로도 자주 인용됩니다. 이 작전에서는 영국 해군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이 소유한 작은 배들도 참여하여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구조했습니다. 또한, 프랑스 군대는 덩켈크에서의 철수를 위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며,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동맹국의 정신과 결속력을 높이고, 나치 독일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만들었습니다.

4: “작전의 성과와 후속 조치”

4-1: 유럽전쟁의 전환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은 유럽 전쟁에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 작전이 실패했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대부분 포로가 되거나 전멸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독일의 유럽 침공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전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살아남아 다시 전선에 서고, 동맹국과 함께 독일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4-2: “이후의 전쟁과 영국의 결의”

됭케르크 철수작전은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를 구조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이 전쟁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철수작전 이후에도 독일은 계속해서 유럽을 침공하고 점령했습니다. 프랑스는 6월에 항복했고, 영국은 독일의 공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이라고 불립니다.

됭케르크 철수작전과 영국 본토 항국전은 영국의 결의와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영국의 총리인 윈스턴 처칠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영국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상륙지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산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영국의 정신을 햠양시키고 전쟁을 이끌어 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동맹국과 함께 독일에 저항하고, 결국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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