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문벌귀족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문벌귀족’은 고려 전기에 과거제를 실시한 이후 대대로 입사(入仕)하여 벼슬을 할 수 있는 집안을 의미하는데, 이 때의 ‘귀족(貴族)’은 혈연 공동체를 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문벌귀족을 형성 할 수 있었을지 같이 한 번 살펴보시죠

왕실족내혼에서 벗어난 외척의 등장

고려초기에 왕실족내혼에서 벗어나서 외척의 등장은 고려 현종때 안산김씨 김은부로부터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고려사회를 우리가 흔히 문벌귀족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가문이 번성해서 귀한 족속이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 가문이 왜 그러면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이 많게 됐느냐라고 하면, “과거에 급제해서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들이 대를 물려서 그러한 지위를 획득 했을 때 문벌화 된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는 할아버지가 과거의 급제해서 5품이상의 관직에 오르고 그 아들도,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5품이상의 관직에 오르면 그 가문이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이 많게 되고 성씨와 본관을 중심으로 해서 귀족화 된다고 합니다.

문신관료의 성장

문벌귀족이 되기 전 문신관료들은 과거를 통해 중서문하성·중추원의 재상, 이부·병부의 판사·상서직 장악을 하였으며 문한관직 점유, 승선 및 지방 수령 등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렇게 고려 시대 국가에서 문무 관료와 직역을 부여받은 계층에게 토지의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수조권을 분급한 제도인 전시과제도에 따른 과전 지급, 공음전 세습 등 안정된 경제 기반을 마련으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강화하였습니다. 이렇게 과거를 통해 3대에 걸쳐 5품이상에 관직에 오른 가문들이 벌열하고 유력 가문끼리의 폐쇄적인 혼인망을 형성하여 사회적 권력 위상을 세습하였습니다.
또한 전직 고위 관료 및 과거 시험관인 지공거 역임자 다수들이 사학의 창설자 되어 지방에서 재력을 쌓았습니다.

문종과 외척을 맺은 문벌귀족

문벌귀족은 본격적으로 외척의 관계를 맺으며 형성한 때는 문종의 다섯명의 부인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다음은 문종의 가계부입니다.

고려의 전성기를 이끈 제 11대 문종의 업적은 다음글을 확인해주세요!
문종의 업적 알아보기

이 가계도에 특징은 부인은 5명인데 이씨인 왕후가 3명 인예왕후 이씨, 인경현비 이씨, 인절현비 이씨가 있었고 이 세명의 부인에게서 많은 자녀가 태어났고, 특히 인예왕후 이씨에서만 많은 자녀가 태어납니다. 이 이씨 세자매가 바로 인주이씨 이자연의 딸들입니다. 문종은 이자연이라고 하는 외척을 들이고 딸을 맞이하고, 또 다른 두 딸을 맞이하며 문종은 이자연의 세 딸과 혼인을 하며 인주이씨 집안과 강력한 외척 관계를 형성합니다. 여기서 공교롭게도 이자연은 김은부의 사위입니다.

또한 대표적인 문벌 가문으로는 경원 이씨(인주이씨), 경주 김씨, 파평 윤씨, 철원 최씨, 해주 최씨, 남평 문씨 등이 있으며 파평 윤씨라고 한다면 윤관으로부터 윤언이, 혹은 그 윤관의 손자대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급제합니다. 그리고 높은 관직에 올라가죠 그렇게 되면 윤관 때부터 파평 윤씨라고 하는 것을 문벌화된 가문으로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문벌화된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혼인을 통해서 유지했고 그 혼인이 자기들과 비슷하게 문벌화된 가문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중첩적인 혼인 혹은 폐쇄적인 혼이 망이라고 합니다. 보통 20개 미만의 문벌화된 가문끼리 혼인을 합니다. 근데 고려에서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왕 씨 가문. 즉 국왕의 가문이었고 그다음으로는 왕 씨와 전 대부터 혼인을 맺었던 작 태조 때부터 혼인을 맺었던 종실 가문입니다. 그래서 이자연의 집안은 왕 씨와 직접 혼인을 했기 때문에 좋은 가문이 되었습니다. 또한 다른 가문들은 좋은 가문이 되기 위해서 이자연의 집안의 사람들과 혼인을 하려고 했고 또 다른 가문은 그 혼인을 한 집안의 자제와 혼인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이자연이 안산김 씨 김은부의 사위라는 것을 보면 폐쇄적인 혼인망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벌귀족의 성향은 더욱 짙어져 갔습니다. 그러한 현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문종의 가계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관련사료

1. [관련사료] 최사추
최사추(崔思諏)는 자가 가언(嘉言)이며, 처음 이름이 최사순(崔思順)인데 뒤에 지금 이름을 하사받았다.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손자로 어릴 때부터 공부에 힘쓰고 글을 잘 지었다. 문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왕은 최사추가 명문의 자식으로 박학하고 견문이 많다하여 내시성(內侍省)으로 불러들여 함께 대화를 나누어 보고는 그 응대하는 것이 자신의 뜻과 맞으므로 기뻐하였다.
[『고려사』 권96, 열전9 최사추]

2. [관련 사료] 문종의 후비

  1. 인경현비(仁敬賢妃) 이씨(李氏)
    인경현비 이씨 또한 이자연(李子淵)의 딸로, 수령궁주(壽寧宮主)라는 칭호를
    받았다가 문종 36년(1082) 정월에는 숙비(淑妃)로 봉해졌다. 조선공(朝鮮公) 왕도
    (王燾)·부여공(扶餘公) 왕수(王)·진한공(辰韓公) 왕유(王愉)를 낳았으며,
    죽은 후 인경(仁敬)이란 시호를 받았다.
  2. 인절현비(仁節賢妃) 이씨(李氏)
    인절현비 이씨 또한 이자연(李子淵)의 딸로, 숭경궁주(崇敬宮主)라는 칭호를 받았다.
    문종 36년 7월에 죽자 시호를 인절(仁節)이라 하였다.
  3. 인목덕비(仁穆德妃) 김씨(金氏)
    인목덕비 김씨는 시중(侍中) 김원충(金元冲)의 딸로, 숭화궁주(崇化宮主)라는 칭호
    를 받았다. 선종 11년 6월에 죽자 시호를 인목(仁穆)이라 하였다.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이렇게 과거를 통해 3대에 걸쳐 5품이상에 관직에 오른 가문들이 벌열하고 유력 가문끼리의 폐쇄적인 혼인망을 형성하여 사회적 권력 위상을 세습한 가문을 문벌귀족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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