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시간에서는 문종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시간에서는 고려 왕실의 족내혼과 외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려왕실의 혼인 족내혼
고려 왕실에 어떤 혼인에 관해서는 흔히 왕실 족내혼이라고 표현이 되는 혼인 정책으로 이해가 됩니다. 왕실 내에서 왕실에 속하는 사람들끼리 혼인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 출발점은 태조가 호족과의 연합을 통해서 후비를 29명을 맞이하고 여러 가문의 딸들과 혼인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자식들이 생긴 상태에서 태조의 입장에서는 첫 번째로 후비 가문의 협력을 받았기 때문에 두 번째로 태조의 권력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후비 29명은 고려왕실에 기반을 성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어느 가문에서 딸이 낳은 자식에게 왕권이 물려질 것이냐 라고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고려 초기 왕자의 난을 겪습니다. 그 뒤 광종이 권력을 획득을 하였습니다. 광종은 호족을 억압시키기고 왕권을 강화한 상태에서 광종 때 왕실족내혼을 확실하게 안착시킵니다.
광종 입장에서는 왕족 간의 결집을 가능하게 하고 광종 때 자기 정치 안정의 기반을 왕실 간의 족내혼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이 족내혼은 목종 때까지 태혜정광경성목, 현종 다음 목종 때 7대 까지는 지속이 됩니다. 그런데 이 왕실 족내혼이라고 하는 것이 왕건의 피가 속한 사람들끼리만 혼인을 하다 보니까 초창기에는 통혼권에 해당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점점 통혼권에 속해지는 사람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러자 왕위 계승권자가 단절될 위기에 있었고 이렇게 어떤 왕실 끼리에 독점적 혼인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관료층에서는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런 내부적인 이유와 거란의 침략과 현종의 어떤 남쪽 지방으로의 피신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종 때 이 왕실의 혼인에 전환점을 이르게 됩니다.
◇ 고려 왕실 족내혼의 형태
- 공주公主의 혼인대상은 거의 왕족이었습니다. 일정한 통혼권에 속하는 인물 가운데 용모, 성격, 학식 등이
뛰어난 인물이 공주의 배우자로 선정됨. - 통혼의 범위는 두가지로 나뉩니다.
목종 이전-왕실 내 모계母系를 달리하는 두 왕족 간 자녀 교환을 하였습니다.
목종 이후–왕실 내 왕위를 잇는 가계, 이들에게 배우자를 공급하는 가계로 나뉘었습니다.
☞ 왕실 혈통을 유지하고 외손外孫을 왕족으로 묶어둘 수 있었음
- 국왕이 왕족 내에서 왕비를 맞는 경우 왕실이 아닌 이성異姓과 혼인하더라도 왕비 한 명은 반드시 족내혼을 하였습니다.
- 왕비는 모계와 관련되는 성姓 사용하였습니다.
태조~목종 기간 왕녀들은 태조비太祖妃의 성을 취함 – 1대 모성, 2대 조모성, 3대 증조모성
☞ 혈족의 가계계승이 어머니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었던 고려전기 사회 환경을 보여줍니다.
외척의 탄생
현종때 족내혼과 족외혼을 거치면서 귀족층에게 왕실과의 혼인의 길을 트게 됩니다. 왕실 족내혼의 전통에서 현종 때 외척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받아 공주지방까지 피신을 가게 되면서 상당한 고초를 겪게 됩니다. 왕으로써의 위신이 깎이는 처지에 있고 거란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현종이 생각하는 모습과는 다른 형태이면서 현종 자신은 개경 즉 수도 주변만 통치하는 왕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때 김은부라는 사람이 현종을 모시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기의 딸을 납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현종이 개경으로 돌아간 이후 김은부가 낳은 다른 두 딸을 다시 후비로 들이게 되는데 이 자체가 현종이 약화된 왕권을 지방에 있는 세력을 통해서 강화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종 때 김은부가 외척이 된 이후로 김은분의 사위인 이자연의 경우에 상당히 중요한 정치적 성장의 계기를 확인하고 문종에게 세딸을 납비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고려의 가장 중요한 왕실 외척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자연은 문종과 어떤 외척관계를 형성한데 그치지 않고 다른 가문들이 이자연의 가문과 중첩적인 혼인을 하고 거기에서 낳은 자식들이 왕실에서 낳은 자식들도 여러 가문들과 중첩적인 혼인에서 나온 자식들이 고위직에 오르게 되고 이자연, 인주이씨의 가문은 고려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문종 이후에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까지 숙종을 제외한 고려 국왕들은 이자연에서 손자 이자겸까지 3대에 걸쳐 인주이씨 달들을 왕비로 맞이하게 됩니다.
숙종의 즉위 문제 : 이자의의 난
문종이 죽고 선종, 순종 형제지간의 즉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종이 아들들보다 자기 형제들이 나이가 많기 때문에 선종의 동생인 숙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왕위가 계승이 되겠다고 생각하였지만 선종이 11세의 어린나이의 자신의 아들 헌종을 즉위 시키게 됩니다.
그 당시 숙종은 소태보, 왕공무와 같은 무사 세력 뿐만 아니고 어떤 사병들 상공옥 같은 세력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위를 차지할 계획을 세우고 이자의라는 사람이 한산후라는 사람을 후사로 해서 왕실을 넘볼려고 한다 라는 핑계하에 숙종이 이자의를 제거하고 헌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서 즉위를 하게 됩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중요한 사건이 발생을 하게 됩니다.
숙종의 쿠데타에 가까운 집권이라고 하는 것은 사병이라고 하는 성격이 호족 이후로 해소되지 않는 상태에 있었다는 고려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외척이 왕실에서 차지하는것 그로인해서 형제상속과 부자상속이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부자상속을 뒤엎을만한 형제상속의 힘이 훨씬 더 쎗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숙종이 이자의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지만 이자연의 가문에서는 숙종 자체가 인주이씨 집에 외손이기 때문에 크게 손해 볼 건 없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관련 사료
광종때에 왕실 족내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후비 열전의 내용입니다.
[관련사료] 광종의 후비
- 1.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 대목왕후 황보씨는 태조 왕건의 딸이다. 경종 및 효화태자(孝和太子), 천추부인(千秋夫人)·보화부인(寶華夫人)과 공주 한 명을 낳았다.광종 7년(956), 노비의 실태를 조사해 귀속이 정당한가를 가리어내게 하자, 주인을 배반하는 노비가 크게 늘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조가 성행했다. 사람들이 다들 원망하자 왕후가 간곡히 간쟁했으나 광종은 듣지 않았다. 죽은 후 시호를 대목왕후라 정하고 광종의 묘정에 부제(祔祭)하였다.
- 2.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 임씨(林氏): 경화궁부인 임씨는 혜종의 딸이다. 혜종 2년(945) 왕규(王規)가 왕의 동생 인 왕요(王堯 : 정종)와 왕소(王昭 : 광종)가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참소하자, 혜종이 자기 딸을 왕소의 처로 삼아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였다. 이 기록은 「왕규전(王規傳)」에 나온다.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외척이 등장하게 된 현종과 김은부의 사료를 보고 가겠습니다.
[관련 사료] 현종과 김은부
왕이 거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하다가 공주에 머물게 되자, 김은부는 예를 갖추어 교외에서 맞이하면서 “성상께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온갖 고생을 겪으시며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실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 까?”라고 위로하고 의대와 토산물을 올렸다. 왕이 그제서야 옷을 갈아입 고 호종하는 관리들에게 토산물을 나누어주었다. 왕이 파산역(巴山驛) 에 도착했지만 역리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고 수라간에 먹을 것조차 없자, 김은부가 다시 음식을 올리며 아침 저녁으로 정성껏 받들었다. 거란군 이 퇴각한 후 왕이 상경 길에 다시 공주에 유숙하게 되자, 김은부는 맏딸 을 시켜 어의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이로 인해 그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 는데, 이 이가 원성왕후(元成王后)이며, 원혜왕후(元惠王后)·원평왕후 (元平王后) 등 두 왕후도 김은부의 딸이었다.
[『고려사』 권94, 열전7 김은부]
여기서는 공주지방에서의 왕의 고충과 김은부의 예우가 우연은 아닐것입니다. 김은부가 이걸 사전에 준비를 했다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당시 고려에 국왕의 모습 왕실의 모습 지방의 세력가의 모습들을 추측케하는 사료입니다. 그리고 현종대에 족내혼에서 외척의 등장에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