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예종 때까지 이어집니다. 숙종의 뒤를 이어서 16대 국왕 예종이 즉위를 합니다. 예종은 17년 동안 재위에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정말 다양한 제도가 만들어집니다.
1. 예종대 개혁 정치
1.1 개혁 정치 배경
예종의 개혁정치에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 예종이 즉위를 하면서 개혁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백성들이 자기들이 사는 삶의 터전에서 유리되었고 도망가는 현실이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사료를 보겠습니다.
관련사료 (1)
・ 갑신일.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우리 태조께서 어지러운 세상을 올바 르게 다스려 처음[草昧] 나라를 여신[經綸)]이래 여러 성군들께서 그 위업을 지켜 지금 과인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 각 도(道)의 주군(州郡)에 있는 수령[司牧] 가운데 청렴하고 백성을 잘 돌보는 자는 열에 한 둘도 없는 실정 이다. 오히려 이익을 좇고 이름만 내려하면서 정치의 근본을 파괴하며, 뇌물 을 좋아하고 사리사욕만 도모하여 백성을 해치고 있다. 이 때문에 고향을 떠 나 유랑하는 백성들이 속출해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나 비어 버렸으니[十室 九空] 짐은 실로 통분을 느낀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기실 지방의 인사 고과[殿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목민관에 대한 포상과 징벌이 없었기 때문이니, 명신(名臣)을 시켜 지방을 순시하게 하고서 수령들에 대한 인사 고 과를 매겨 보고해야 할 것이다. 짐은 이제 상벌을 명확히 하는 일을 우선 과제 로 삼으리니 추밀대신(樞密大臣)들은 짐의 뜻을 헤아려 선대의 법전(法典)을 검토한 다음 관료들에 대한 징계와 교육을 법으로 확립하라.”
[『고려사 』권12, 세가12 예종 즉위년 12월]
다음의 사료를 보면 예종이 즉위해서 교서를 내립니다. 태조 이후에 여러 성군의 위업을 받아서 자기에게 이르렀는데 각 도의 주군에 있는 수령 가운데 청렴하고 백성을 돌보는 자는 열에 한둘이 없고 이익을 좇고 이름만 내려 하는 정치적 근본을 파괴하고 뇌물을 좋아하고 사리사욕만 도모해서 백성을 해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백성들이 속출해서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있다. 라는 뜻인 십실구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사료를 보면 고려 당시 백성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힘든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 유민 안집과 백성 구휼
그래서 예종은 즉위 초에 이러한 유민들을 안집 시키고 지방의 폐단과 모순을 방지하기 위해 감무(監務)라고 하는 아주 특수한 지방관을 파견합니다. 감무 파견과 관련해서 사료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종 즉위 1년째 되는 해에 조서를 내립니다.
관련사료(2)
・ 경인일.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얼마 전 서해도 유주(儒州 : 지금의 황해 남도 신천군 문화면)·안악(安岳 : 지금의 황해남도 안악군)·장연(長淵 : 지금의 황해남도 장연군) 현(縣) 등지에 유민이 발생했다는 해당 관청의 보고를 받고는 즉시 감무관(監務官)을 파견해 그들을 안무(安撫)하게 했더니 귀향하는 유민들 이 차츰 늘어나 백성의 살림살이도 한결 나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우봉(牛 峯 : 지금의 황해북도 금천군)·토산(兎山 : 지금의 황해북도 토산군 토산)·적성 (積城 :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적성면)·파평(坡平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사천 (沙川 :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삭녕(朔寧 :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안협(安峽 : 지금의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승령(僧嶺 :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동음(洞陰 : 지금의 강원도 신철원)·안주(安州 : 지금의 황해남도 재령군)·영강(永康 : 지금의 황해남도 강령군)·가화(嘉禾 : 지금의 황해남도 송화군)·청송(靑松 : 지금의 황해 남도 송화군)·인의(仁義 :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금성(金城 : 지금의 강원도 금화군)·제주(堤州 :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보령(保寧 : 지금의 충청남 도 보령군)·여미(餘尾)·당진(唐津 :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군)·정안(定安 :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만경(萬頃 :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부윤(富閏)·양구 (楊口 : 지금의 강원도 양구군)·낭천(狼川 :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등 군현에도 유민이 생길 조짐이 있다하니 유주(儒州 : 지금의 황해남도 은율군)의 예에 따라 감무(監務)를 배치해 백성들을 안무하게 하라.”
[『고려사 』 권12, 세가12 예종 1년 4월]
이 사료를 보면 예종이 즉위한 지 1년째인데도 유주 안약 황해도 근처의 유민들이 발생해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감무라는 지방관을 파견했더니 유민이 안집 되고 산업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종은 감무에 관해 연구를 하여 감무는 이 이후에도 예종대 명종대 공양왕대 간헐적으로 파견이 됩니다. 이것은 공식 지방관은 아니고 높은 직급이 아니지만, 국왕의 측근 세력으로서 지역에 가서 국왕에 강력한 명령과 사원의 도움을 받아서 유민을 안집 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종은 개혁정치 일차적 목적으로 유민 안집과 백성 구휼 해결을 꼽습니다. 이 구휼을 위해서 지방민의 삶이 피폐하기 때문에 전염병이 돌고 자연환경이 안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혜민국을 설치합니다. 오늘날의 약국과 같은 시스템입니다. 또한 구제도감을 설치하여 백성들을 공적으로 돌보는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예종의 개혁정치가 유민 안집과 백성구휼로 시작됐다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인 그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기본이 흔들리는 안타까움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1.3. 국학진흥책
그 뒤 실시한 개혁정책이 국학 진흥책입니다. 이것은 고려 시대에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통로가 과거에 급제하거나, 귀족의 자제로서 음직에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급제라고 하는 것은 구재학당 같은 사학을 통해서 진출 통로가 잡혀있기 따라서 국자감이라고 하는 국학이 약화 되어 있었습니다.
예종은 한안인을 비롯한 측근 세력을 통해서 세력을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집권 기간 내내 국학을 진흥하고 교육 계획을 단행했습니다. 7재(유학儒學 전공의 6개 재와 무학武學을 전공하는 강예재講藝齋 등 7개로 구성)를 설치해서 국자감의 쇠퇴를 방지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시도합니다. 국학진흥의 또 다른 모습으로 청연각과 보문각을 설치합니다(1116). 이곳은 경연제도의 시발점이 된 중요한 기관입니다. 그리고 양현고(1119)라고 하는 일종의 장학재단을 만들어 국학의 인재들이 성장해가는데 재정적인 뒷받침을 하도록 합니다.
1.4. 후계구도 안정을 위한 외척의 부활
다른 한편으로 예종은 즉위 당시에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 숙종이 그토록 배척했던 인주 이 씨 중에서 왕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이자겸의 딸이었습니다. 물론 이자겸은 당시 인주 이 씨 세력 중에서 굉장히 취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인주 이 씨가 다시 왕실로 돌아오는 계기가 됩니다.
그 이유는 예종이 즉위를 해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왕위를 물려줄 시기에 아버지가 비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자기가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예종은 즉위 시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으면서 자녀 출산도 늦었고 다음에 왕위를 계승할 때 평균수명에 비추어서 4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그 아들이 어리면 그 많은 자신의 동생들이 나를 지지하는 측근 세력의 도움을 받아서 아들 대신 자신의 동생을 즉위시켜서 개혁정치를 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어서 오로지 왕실의 권위에 의해서만 자기들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외척만이 제 아들을 안정적으로 왕위계승을 할 것으로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이자겸의 땀을 왕비로 맞이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결과론적으로 이자겸은 대단히 부패한 세력이 됩니다. 예종은 청요직과 개혁적인 신진세력을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피려는 한 측면과 부패한 이자겸을 통해서 자기 아들의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해야 하는 또 다른 측면에서 모순을 일으키고 궁극적으로는 이자겸의 편을 듭니다. 예종의 사후 이자겸이 한안인파와 같은 세력들을 제거하고 인종대에 세력을 차지하게 됩니다. 예종은 자기 아들의 안정적 왕위계승을 바랐지만, 이자겸의 반란을 초래하였습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묘청의 난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1.5. 왕권의 권위를 위한 예제 정비
또 왕권의 권위를 위해서 예제를 정비하게 됩니다. 당시 상하무등: 복식 제도에 상·하의 구분이 없어 혼란되어있어 예제를 정비하게 되고, 예의상정소(1113)을 설치하게 됩니다. 그래서 표상과 서간등의 행정 서식과 의복제도 등을 정비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제를 바로 잡고 상·하의 복식을 명확히 해서 궁극적으로는 왕의 권위를 높이게 됩니다. 광종 때 공복 제도를 만든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예의상정소를 통한 고려예제는 자기의 손자 대인 의종 때 상정고금례라고 하는 예서 편찬으로 확립이 되게 됩니다.
1.6. 송나라와의 교환
예종의 개혁정치 특징 중 하나가 송나라 황제 권위 송나라 제도를 많이 본뜬 것인데 국학진흥을 할 때도 학사들을 송나라에 국학 기구에 파견을 보냅니다. 이곳에서 국학의 여러 제도를 학습해와 고려의 국학진흥에 활용하였습니다. 또 송나라 황제로부터 대성악이라고 하는 궁중음악을 하사(1116)받습니다. 그 음악을 연회에 연주함으로써 송나라 황제 권위를 빌려서 예종을 비롯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시도합니다. 당시에는 여진과의 전쟁과 계속되는 자연재해 때문에 기근이 발생하고 질병이 발생해서 의술이라고 하는 것들이 굉장히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술과 도교 진흥을 통해서 해결하고 했습니다. 도교를 통해 민생안정을 도모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고 이것 또한 송나라의 제도를 활용합니다. 이중약이라고 하는 사람이 송나라에 도교를 배워 복원궁이라고 하는 도관을 설치해 도교에 의례를 실시하고 도교에 접목된 의술을 펼쳐 사상적인 측면 생활적인 측면 의학적인 측면에서 현실적인 모순 타개를 해 나갑니다.
1.7. 대외적인 개혁정책
이런 예종의 개혁정책은 대외적으로 여진정벌이라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윤관을 원수로 하고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서 여진 정벌을 추진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자의적인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정벌은 윤관의 여진 정벌 조선 시대 대마도 정벌처럼 흔치 않은데 윤관은 자의적으로 여진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9성을 설치하게 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반환하게 됩니다.
2. 한인인세력의 성장과 이자겸 세력의 대립
2.1. 한안인 세력의 성장
예종대에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핵심이 한안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그를 둘러싼 세력을 학계에서는 한안인 세력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력들을 대체로 과거를 통해서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람이고 주로 청렴한 성품이었습니다. 이는 문벌귀족들이 대를 물려서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이에 비래서 한안인 세력은 막 과거에 진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덜 부패하고 상대적으로 청렴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십실구공 ‘十室九空’의 열악한 사정은 관료의 청렴성이기 때문이라며 청렴성을 요구합니다. 이런 한안인 세력들은 간관직, 국왕, 관료의 잘못을 따지는데 종사했기 때문에 사회적 명망을 얻어 정치세력화에 성공하였습니다. 또한 개혁을 요구하는 예종에 의해서 국왕의 총애를 받아 측근 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2.2. 이자겸 세력의 성장
이에 비해서 1108년(예종 3년)에 이자겸의 세력은 이자겸의 딸이 예종의 비가 되며 이자겸은 정치적으로 성장해갑니다. 또한 1114년(예종 9년) 그 예종의 아들 외손자가 왕태자로 책봉되면서 급격하게 이자겸과 가문의 지위는 상승하게 됩니다. 예종은 연덕궁주에게서 아들이 태어나고 왕태자를 책봉하고 나서는 그를 후일에 인종을 통해서 자기 왕위를 물려 줘야 하기 때문에 이 왕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왕의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이라고 하는 세력 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자겸에게 더 많은 힘을 붙여주고 안전한 왕위계승을 위한 후원자를 자처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자겸 세력을 부패하게 되고 공공연한 뇌물 수수 등으로 다른 신료들의 불만이 고조 되고 고려사회를 보면 이자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장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환호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자겸의 집안의 창고에는 생선과 고기 과일들이 썩어났다. 이런 표현들로 볼 때 이자겸 개인이나 가문은 상당히 부패 했던 거 같습니다.
2.3 한안인 세력과 이자겸 세력의 대립
그런데도 예종이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은 왕위계승과 관련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한안인 세력과 이자겸 세력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예종은 말기에 접어들면 접어들수록 고려 조정의 내부는 한쪽은 한안인 세력 한쪽은 이자겸 세력이 양분하는 꼴로 되고 물론 양 세력은 예종에게는 전부 측근 세력이었습니다. 근데 성격은 전혀 상반되었습니다. 한안인 세력은 대게 과거 출신들로 구성된 청렴한 성품이고 이자겸 세력은 문벌이 강하면서도 부패한 관료 쪽에서 많이 치우쳐져 있는 고려의 양 세력들이 팽배하게 맞물려 있을 때 두 세력을 둘러싼 갈등 들이 나오게 됩니다. 서로 이제 반대편의 신료들을 탄핵하였습니다. 예종의 입장은 간관직 신료들의 잘잘못을 비판하는 간관직의 아들이 있기 때문에 간관직을 이용해서 과도한 견제를 하게 되고 예종은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 아들 태자의 안위에 중점을 두어서 이자겸의 세력에 힘을 더 실어줍니다. 그리고 예 종이 죽게 되자 즉각적으로 이자겸은 한안인 세력을 제거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사료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관련사료 (3)
예종이 죽자 한안인과 문공미가 태의(太醫) 최사전(崔思全)이 치료를 등한히 했다고 하여 법으로 조치하려고 하였으므로 최사전이 그를 크게 원망하였다. 또 이자겸이 최유적(崔惟迪)을 급사중(給事中)으로 삼자 여론이 분분하였다. 내급사(內給事) 장응추(張應樞)는 권세가에 빌붙어 아부하기를 좋아하는 자 로, 최유적이 노비 20명을 이자겸에게 뇌물로 주고 그 직책을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몰래 한안인에게 일러주었고 한안인은 성(省) 안에서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최유적이 그 말을 듣고 이자겸에게 호소하자 이자겸은 대노하여 어사 대(御史臺)에다가 사실을 밝혀줄 것을 요청했다. 한안인은 무안하고 겁이 난 나머지 쉬겠다고 보고하고 집에 있으면서, 문공미 및 집안 동생인 정극영(鄭克 永)과 매제인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영(李永) 등과 여러 차례 모였다가 밤이 깊으면 헤어지곤 했다. 최사전은 그 틈을 타 옛날의 원한을 풀려고 간교 한 인물인 채석(蔡碩)과 함께 이자량과 최홍재에게 “한안인과 문공미가 파당 을 맺어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장차 이영공(李令公 : 이자겸)에게 불리할 것 입니다.”고 참소하였다. 이자겸이 크게 의심한 나머지 죄를 날조하여 왕에게 보고한 다음, 한안인을 승주(昇州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감물도 (甘勿島)로 유배보냈다가 물에 빠뜨려 죽였다. 또 문공미는 충주(忠州 : 지금 의 충청북도 충주시)로 유배보내고 한주는 한안인의 일당이라 하여 영광군(靈 光郡 :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 송도(松島)로 유배보냈다. 또 이영과 정극영은 원지로 유배보내고 한안인의 형인 상서우승(尙書右丞) 한안중(韓安中), 동생인 승려 영륜(永倫), 사촌동생인 예부낭중(禮部郞中) 한충(韓冲), 처남인 시어사(侍御史) 임존(林存), 사위인 합문지후(閤門祗候) 이중약(李仲若)의 아들 이정(李) 등 네 명, 문공미의 동생인 지후(祗候) 문공 유(文公裕), 승려 가관(可觀), 정극영의 매제인 우정언(右正言) 최거린(崔巨 鱗), 동서인 원외랑(員外郞) 임원준(任元濬), 한안중의 아들 한윤(韓綸) 등 다섯 명, 이영의 아들 이원장(李元長) 등 세 명이 모두 연좌되어 유배되었고, 그 일가붙이로 파직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중약은 의술에 능했으므로 의심한 나머지 사람을 뒤따라 보내 물에 빠뜨려 죽였다. 형부(刑部)에서는 다시 좌 정언 이봉원(李逢原)과 사천감(司天監) 전간(全幹) 및 전직(殿直) 안천향(安 天餉) 등이 늘 한안인의 집에 모였으니, 반드시 음모에 참가했을 것이라고 탄 핵하여 직책을 박탈했다.
[『고려사 』 권97, 열전10 한안인]
예종이 죽고 바로 나서 한안인과 문공미가 태이 최사전이 치료를 동한 시 했다고 법으로 조치하려고 하였으므로 최사전이 그를 크게 원망하였다. 또 이자겸이 최유적을 급사중으로 삼자 여론이 분분하였다. 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자겸이 대노하여 한안인은 무안하고 대노하니까 겁이 나서 쉬겠다고 집에 가있자 바로 이들을 제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안인을 승주로 유배를 보내서 나중에 죽이고 여러 세력들을 제거하게 됩니다.
이영 정극영 한안인의 형 한안중 동생인 승려 소위 말해서 한안인과 관련된 족당 세력들을 상당히 많이 유배를하게 됩니다. 이러한 한안인 세력들이 제거 되었을 때 흥미로운 사실은 이중약은 의술이 능했으므로 의심한 사람을 의심을 해서 뒤따라 죽였다.라고 합니다. 이중약은 도교라던가 의술로서 예종의 왕권강화책을 집행했던 사람입니다. 이 두세력의 다툼 끝에 고려사 에 표현된 내용은 궁중에 절반이 텅 비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조정을 차지하고 있던 한안인과 이자겸 세력이 예종의 사후 이자겸 세력의 즉각적인 공격으로 한인세력이 일거에 제거됨으로써 예종의 그토록 바라왔던 개혁은 실패하고 안정적인 왕위계승은 이자겸 의 손에 달리게 되는 형국에 빠지게 되고 결과론적으로 이자겸은 인종의 안위를 흔드는 이자겸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래서 예종은 개혁17년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왕위계승이라고 하는 근복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고 자기 개혁을 추진하는 한안인 세력과 그 개혁의 대상이 되는 이자겸이 예종의 양 측근 세력이었다 라고 하는 역설적인 모습 끝에 예종 사후 12세기 개혁은 1차적으로 마무리하게 됩니다.
예종의 개혁추진과 정치세력 갈등은 예종이 즉위할 당시에 국가적인 형편에 어려움, 개혁추진의 난항, 정치세력의 갈등 등 때문에 상당한 변화를 추구 했지만 예종의 사후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인종의 즉위와 함께 예종의 개혁을 추진했던 세력들의 일차적인 패퇴를 맞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