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서경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은 왜 이뤄졌을까

이번시간에는 서경천도운동과 묘청의 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고려 왕조가 470년 동안 유지되는데 왕조는 지속됩니다. 그래서 고려는 1왕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신들 혹은 문벌화 되는 무신, 혹은 관료들이 지배를 하는 시기, 무신들이 지배를 하는 시기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또한 국내정치세력의 문제에 끝나지 않고 원이라고 하는 나라와의 관계. 간섭을 받는 시기, 그 끝에 조선으로 이행하는 시기를 합치면 이 세가지 성격이 다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왕조는 1왕조 3체제라고 불립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정국

서경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에 가장 가까운 원인은 이자겸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자겸은 인종에게 왕의 외할아버지이면서도 장인이 되는 외척으로서의 중첩적 혼인이 이루어진 과정에서 이미 예종대부터 이자겸의 지위는 상당히 올라와 있었고 예종의 죽음 이후에 예종의 또 다른 측근이었던 한안인 세력을 일거에 제거하고 이자겸이 궁궐 전체를 장악한 상태에서 이것에 반대하는 국왕의 측근세력들과 이자겸의 측근이었던 척준경의 반발로 인해서 이자겸이 제거가 됩니다. 당시는 한안인 세력이 제거되고 이자겸 세력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궁궐이 재편이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내적으로는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이자겸에 대해서 알아보기

정통관료 세력과, 신진관료 세력

이 때 고려왕조를 이끌어간 세력은 정통관료와 같은 임원후라던가 김부식처럼 학문적 소양이 있는 유신들, 근왕적인 정치세력들이 정국을 주도하게됩니다. 이들은 개경을 중심으로 자기들의 정치적 기반이 형성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 금나라가 부상을 하고 대외적인 관계가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안인 세력의 제거 과정 속에서 일부 세력들이 살아나고 그 세력들이 주로 서경출신의 신진관료들과 결합을 하여 김부식과 같이 유교중심의 개경세력들과 대척점을 이루게 됩니다. 특히 당시 서경출신의 문장력이 뛰어나고 유능한 관리였던 정지상이 묘청과 백수한을 천거함으로써 서경출신들이 신진관료로써 등장하게 됩니다.

인종이 성장을 하게 되고 1127년(인종 5년) 서경에 행차해서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는 명목으로 유신지교 15개조를 발표합니다. 이것을 유신정치라고 말합니다. 이 15개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1127년(인종 5) 서경 행차하여 관정도량 베풀고 ‘유신지교惟新之敎’ 15개조 발표
① 方澤에서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어 四郊의 기운을 맞을 것.
② 사신을 지방에 보내어 자사·현령의 잘잘못을 조사하여 그를 포상하거나 좌
천하게 할 것.
③ 수레나 복장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도록 힘쓸 것.
④ 쓸데없는 관원과 급하지 않은 사무를 제거할 것.
⑤ 농사일을 힘쓰게 하여 백성의 식량을 풍족하게 할 것.
⑥ 侍從官이 모두 한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고, 천거된 사람이 올바른 인물이 아니면 그를 벌할 것.
⑦ 국고의 식량 저축에 힘써서 백성을 구제할 일에 대비할 것.
⑧ 백성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것에 제도를 세워 일정한 조세와 공물 이외는 함
부로 걷지 못하게 할 것.
⑨ 군사를 보살펴 일정한 시기의 훈련 이외에는 복무하지 않도록 할 것.
⑩ 백성을 보살펴 지방에 정착하여 살게 하며 도망하여 흩어지지 않도록 할 것.
⑪ 濟危鋪와 大悲院에는 저축을 풍족히 하여 질병에 걸린 자를 구제할 것.
⑫ 국고의 묵은 식량을 억지로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서 무리하게 그 이자를 받
지 못하도록 하며, 또 묵고 썩은 곡식을 백성에게 찧으라고 강요하지 말 것.
⑬ 선비를 선발하는데 詩·賦·論을 쓰게 할 것.
⑭ 모든 고을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확충할 것.
⑮ 산림이나 못에서 생산되는 이득을 백성들과 나누어 갖고 침해하지 말 것.

이는 국가 전반에 걸쳐서 부실한 부분들을 해결하고 지방의 문제와 백성들에 곤궁한 삶의 문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는 문제, 지방관의 대체를 잡는 문제, 조세 제도의 확립에 대한 문제를 내세워서 정국을 새롭게 이끌려는 노력을 합니다.

서경 천도 주장의 배경

이런 와중에 유신정치의 일환으로 서경세력들이 서경천도를 주장하게 됩니다. 서경천도를 주장하게 되는 뿌리는 결국 고려 건국 과정에서 도선이 고려는 부처의 가호와 지덕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신라의 지덕이 쇠전했기 때문에 신라가 망했다. 그래서 새로운 삼한의 통일군주로서 왕건이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지덕이 좋은 개경을 중심으로 고려라고 하는 나라를 세웠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개경에 위엄, 공간적 권위의 상실이 일어나면 고려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항상 내제된 문제였습니다. 태조가 개경에 길지를 가지고 고려를 건국하며 고려의 왕조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개경의 길지가 잘못됐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천도를 하자거나 개경의 땅의 기운이 다했기 떄문에 위험하니 다른 곳에 비보를 해야 한다. 라는 주장은 출발부터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경파의 서경천도 주장

고려 중기를 넘어가며 고려사회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판단에 기초하여 새로운 문제를 제시할 때 국왕은 유신지교 15개조를 발표했습니다. 하짐나 이것을 개경의 땅의 기운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땅의 기운을 찾아야 된다는 풍수지리적인 사상으로 당시 고려문제를 해결하려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묘청, 백수한, 정지상과 같은 서경파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풍수지리와 도참신앙이 결합된 상태에서 서경왕기설, 서경에 기운이 몰려있으니 이곳에 궁궐을 지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묘청의 주장에 의하면 서경에 궁궐을 지으면 금나라를 우리가 누를 수가 있고 36개의 나라가 와서 항복을 할 것이다. 라는 주장을 펼치고 국토를 새롭게 보는 시각까지 제시합니다. 묘청은 당시에 고려가 처한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큰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경 대화궁의 완공

이에 인종은 일정정도 동의하여 새 궁궐을 짓도록 합니다. 1128년(인종 6년)9월 묘청・백수한 등과 임원역 지역에 새 궁궐 터를 정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인종을 둘러싸고 이 풍수지리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국가정책에 개입을 해도 되느냐에 관한 논란이 많이 있었습니다. 김부식과 같은 세력은 이것은 온당하지 않다며 폐기를 주장하고 서경파들은 충분히 가능성있는 주장이라고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왕권이 취약하고 개경의 낡은 정치에 혐오를 가진 인종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지역으로가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경의 신궁을 짓는 생궁궐을 허락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김안이라고 하는 인종의 측근 세력이 감독을 해서 1129년 (인종 7년) 9월 묘청·백수한 등과 임원역 지역에서 대화궁大華宮이 완공이 됩니다. 이후 인종의 잦은 서경 방문을 하게 됩니다.

서경파의 고려개혁

궁궐이 완성되고 국왕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자 서경세력들은 한발 더 나가서 당시의 고려가 처한 국내적인 문제와 대외적인 문제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주장을 표하게 됩니다. 대내적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서경으로 천도를 하자. 그리고 대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금국을 정벌하자 그리고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는 칭제건원ㅇ르 하자라고 하는 이 세 개의 주장이 동시에 펼쳐집니다. 이것은 각각의 주장이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경으로 천도를 함으로써 지덕을 모으면 고려의 국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중원이 비어 있는 듯한 모습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고 독자적으로 황제를 칭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 고려 역사상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라고 하는 일맥된 논리를 펼치게 됩니다.

묘청의 난 발생

서경에서는 자연재해와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게 되고 인종의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결국에는 서경 천도가 실패로 긑나게 됩니다. 그래서 묘청의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1135년(인종 13년) 정월, 서경에서 묘청, 유참이 분사시랑 조광趙匡 등과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서경에 있는 개경 사람들을 잡어 가두고 군사, 교통상의 요지인 절령, 황해도 자비령을 처단하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고 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 반란은 기존과의 반란과는 다릅니다. 왕권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닌 중앙개경의 문벌귀족을 타도하는데 목적을 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경천도 운동이 갖고 있는 애매한 부분이있습니다. 핵심인물로 떠온 정지상, 백수완, 김완 등은 실제적으로 서경에서 반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개경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지상 같은 경우는 김부식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 이들이 국왕을 새로 임명하지 않았다는 것, 거병사실을 먼저 국왕에 알려다는 점으로 봐서 묘청의 난에 대해서는 기존의 반란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습니다.

묘청의난_당시

묘청의난 진압

이 묘청의 난이 진화하자 정부는 토벌군을 편성하는데 김부식을 총사령관, 책임자로 파견합니다. 그리고 이제 대체적으로 문반과 문벌귀족들로 구성이 돼서 중군,좌군,우군으로 나뉘게 됩니다. 중군 김부식, 임원애, 윤언이 등, 좌군 김부의, 김단, 윤언민 등, 우군 이주연, 진숙 등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김부식은 서경반란의 토벌을 늦췄습니다. 지구전법持久戰法을 써서 반란군을 토벌하는 한편 여러 차례에 걸쳐 항복을 종용합니다. 하지만 조광이 묘청과 관련자들을 죽이고 투항의 뜻을 보임으로써 묘청의 난이 1136년에 평정이 됩니다.

[관련 사료]
묘청의 난 무신. 묘청(妙淸)과 유참(柳旵)이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과 함께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矯制] 유수(留守)와 관리[員僚]들을 가두었다. 또 가짜 승선[僞承宣] 김신(金信)을 보내 서북면병 마사(西北面兵馬使) 이중(李仲) 등 여러 성의 군사 장교를 잡아두고 무릇 개경 [上京] 사람으로 서경[西都]에 있는 자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또한 모두 구류 하였다. 군사를 보내어 절령도(岊嶺道)를 차단하고 또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 의 군사들을 위협하여 징발하고는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 開)로 하였으며 관속(官屬)을 두었고 그 군대는 천견충의(天遣忠義)라고 이름 하였다. 묘청(妙淸)이 조광(趙匡) 등과 함께 관풍전(觀風殿)에 모여 군마(軍馬) 를 호령하고 몇 군데 길로 나누어 곧바로 개경[上京]으로 향하고자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10, 인종 13년 1월]

묘청의 난 이후

이 이후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유교정치이념을 가진 문신관료들, 상당히 근왕적인 세력들, 고려의 기본을 중시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고려의 정국이 유지가 됩니다. 이들은 예제나 과거제도를 정비하고 기본질서를 회복하는 지배체제의 안정화의 노력을 꾀합니다. 하지만 숙종과 예종대의 있었던 지방의 문제, 문벌귀족의 모순, 국왕의 권위 상실과 같은 것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미봉책으로 남게 되고 서경의 반란만 해결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묘청의 난의 진압의 결과는 끝나 있지만 고려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마무리하게 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청의 난 관점

후대에 이 사건을 바라본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굉장히 중요한 사건으로 바라봤습니다. 왜냐하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우리가 나라를 뺏긴 게 우리 역사의 어떤 잘못된 지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으로 우리 역사를 천착해가며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을까라고 고민을 하다 결론 낸 부분을 뽑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역사가 조선에 거쳐서 사대주의에 빠지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나라를 잃게 됐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 천 년대 제 1대 사건, 조선의 역사에서 천년만에 찾아온 중요한 사건이라고 하는 논문을 펼처서 묘청의 난의 실패가 우리 것을 상실하는 계기가 되고 남의 것, 사대가 집하는 세상이 되어 고려 후기, 결국은 조선으로 시대가 넘어가 일제에 나라를 뺏기게 된 것이 아니냐. 라고 하는 역사적 해석을 했습니다. 후대에 이 사건을 평가하는 것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뺏겼을 때 나라를 찾는 수단으로 역사를 공부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 입장에선 묘청의 난을 중요시했던 것은 그 시대의 그 만큼의 몫이 있는 것이고 역사적 해석으로서 무게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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