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의종대 정치상황과 무신정변이 일어난 이유

이번시간에는 의종대 숙종 예종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끝나고 인종대에 어린나이로 왕위에 즉위를 하게 됩니다. 인종은 이자겸의 반란을 겪고 유신정치를 새롭게 펼쳐보려고 했찌만 묘청의 난을 겪게 되고 혼란스러운 과정을 거치고 의종이 즉위를합니다.

의종은 인종의 장자로, 공예태후 임씨의 아들입니다. 이 전까지는 고려사회를 지배한 안삼김씨 김은부로부터 시작한 외척이 주로 인주 이씨들에 의해서 형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자겸의 반란 이후로 극도록 쇠약해지고 무신정변 전개 과정 속에서 전체적으로 개경의 문벌 세력들이 약화되게 됩니다. 그 때 공예태후 임씨의 두 아들 중 첫 번째 아들이 1143년(인종 21년)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리고 1146년에 의종이 즉위를 하게 됩니다. 당시는 고려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을 안정해야 했습니다.

1. 의종의 즉위

하지만 인종의 즉위과정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는데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 사이에서 태자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공예태후 임씨는 두 번째 아들 대녕후 경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 세자를 교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당시의 모습을 사료로 살펴보겠습니다.

[관련 사료] 의종 즉위 과정
・ 처음에 태후가 次子를 사랑하여 세워 태자를 삼고자 하였으므로 왕(의종)이 이를 원망하였다.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공예태후 임씨]
・ 처음 의종이 元子가 되었을 때 襲明이 侍讀하였는데, 인종이 원자로서 책임 을 능히 당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태후 역시 次子를 사랑하여 장차 세워 태자를 삼으려 하거늘 습명이 마음을 다하여 調護하였기 때문에 폐하지 않게 되었다.
[『고려사』 권98, 열전11 정습명]

의종이 원자가 되었을 때 정승명이 의종을 가르쳤습니다. 인종이 원자로서 책임을 능히 당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태후 역시 두 번째 아들을 사랑하여 장차 태자를 삼으려 하거능 습명이 마음을 다하여 도와줬기 때문에 폐하지 않게 되었다. 라고 나와있습니다. 따라서 정습명이라는 신하가 의종의 즉위에 큰 공을 세웠다. 라고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의 부인, 공예태후 임씨는 의종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의종의 즉위과정이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라는 것을 뜻하고 이 말은 즉위한 이후에 왕권이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출발에서 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종의-가계도-1

당시 의종의 가계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 사이에서 의종이 장자로 태어납니다. 그 가운데 동생과의 경합 속에서 의종이 즉위를 하게 됩니다.

2. 의종과 문신의 관계

의종은 즉위를 하자마자 본인의 즉위 과정이 어려움이 있었고, 실질적으로 왕권을 유지하거나 신변의 안전을 꾀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변, 자신에게 친의적인 세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의종은 자신의 측근 세력 ‘환관’에게 세력을 확대, 강화하면서 문신들과 갈등이 생깁니다. 또 대간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의종의 측근들에 대해서 계혹해서 탄핵을 하는 가운데 환관과 또 다른 측근인 내시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3. 환관과 대간의 갈등

3-1. 서대사건

그중에 의종의 측근인 환관 정함이라는 사람에게 일정한 지위를 주려고 하는데 문신 관료들이 서경권, 인사권에 동의 여부를 두고 논란이 생기게 됩니다. 정함이라고 하는 환관을 둘러싸고 의종과 신료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간 간의 대립이 생긴 것입니다.정함이라 하는 환관이 1151년(의종 5년) 왕비를 흥덕궁주(興德宮主)로 봉한 연회에서 왕이 하사한 서대(犀帶)를 불법으로 차고 나왔다가 대관과 대립하였습니다. 서대란 불소 뼈로 만든 것으로 서대 관료, 문신관료들만 차는 의대를 차는것이었습니다. 이에 “감히 대간 왕식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대간들은 눈도 없느냐. 왜 저렇게 환관 정함이라는 사람이 서대를 차고 다녀도 그냥 놔두느냐”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에 대간들이 화를 내고 반발하게 됩니다. 정함은 “이건 내가 임금으로부터 직접받은 물건이다”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여기에 이빈이라는 사람이 그 서대를 가지고 갑니다. 이에 서대를 빼앗긴 정함이 왕에게 가서 사정을 고하니 이빈을 잡아다가 처리를 하게 되고 왕이 직접 가지고 있는 서대를 풀어서 정함에게 나누어 주고 잔치를 베풀게 됩니다.

[관련사료]
정함 문제로 의종과 대간의 대립 ・ 간의(諫議) 왕식(王軾)이 환자(宦者) 내전숭반(內殿崇班) 정함(鄭諴)이 서 대(犀帶)를 띤 것을 보고 대원(臺員)을 가리켜 말하기를, “대간(臺官)은 눈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어사잡단(御史雜端) 이작승(李綽 升)이 벌컥 화를 내며 안색이 변해 말하기를, “그대가 어찌 내가 할지 못할지 를 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작승은 즉시 대리(臺吏) 이빈(李份)으로 하여 금 그 서대를 가져오게 하였다. 정함은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물건이라 하여 주지 않으려 하였으나 이빈이 강제로 가져왔다. 정함이 왕에게 아뢰니 왕이 크게 노하여 내시(內侍) 이성윤(李成允)에게 명하여 이빈을 잡아오게 하였다. 이빈이 대문(臺門)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자 이성윤은 다른 관리인 민효정(閔 孝旌)을 잡아 와서 궁성에 가두었다. 왕이 좋아하지 않으며 잔치를 파하고, 즉 시 왕이 띠고 있던 서대를 풀어 정함에게 하사하고 민효정은 형부(刑部)의 감 옥에 하옥하였다. 대관(臺官)이 왕이 노한 것이 풀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그 서 대를 내시원(內侍院)에 돌려주니 내시집사(內侍執事) 한유공(韓儒功)이 말 하기를, “네가 이미 빼앗아 갔거늘 어째서 돌려 보냈는가.”라고 하였다. 곧이 어 서대를 물리쳤는데, 두세 번 왔다갔다한 이후 서대를 받았다. 대간(臺諫)이 궐문 밖에 엎드려 이성윤 등의 죄를 논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자 대간이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니 왕은 이에 이성윤과 한유공 등 5인을 축출하고 대간 은 조정에 나가 정사를 돌보았다[視事].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5년 윤4월]

3.2 권지합문지후 내정

그로 인해 대간들은 이런 국왕의 횡포에 대해서 반발을 하고 며칠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은 갈등들을 의종5년쯤에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정함에게 “권지합문지후大平好文之主”라고 하는 관직에 내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사대에서 “환관은 일반관료에 참여할 수 없다. 이것은 옛날 제도에 봐도 없는 일이다”고 간청을 했지만 왕이 들어주지를 않습니다. 이것에 대간들은 두문불출하게 됩니다. 그 뒤 왕이 정함을 권지합문지후로 명령한 것을 거두었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 와중에 왕의 동생 “대녕후 경이 반란을 일으킨다.”라고 하는 것을 정함이 모함하는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정함의 “서대 사건”, 정함에게 “권지합문지후” 관직을 주려는 사건들을 통해서 의종은 환관인 정함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아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고 간관들은 고려의 의례라든지 원칙을 강조해서 이것을 반대함으로써 왕권과 간관과 대립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왕권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약한 힘을 환관이라는 측근세력을 통해서 키우려고 하는 노력들을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환관의 문제가 난관에 봉착하자 왕은 다시 내시라고 하는 이 내시는 조선시대 내시하고는 다르게 과거에서 1등에서 3등으로 합격한 굉장히 우수한 실력자들인데 이 사람들을 중용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합니다.

[관련사료]
정함(鄭諴)을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로 삼으니 어사대(御史臺)에서 환자(宦者)로서 조관(朝官)에 참여한 것은 고제(古制)에 없는 일이라 하며 간 쟁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대관(臺官)들은 다시 두문불출하니 대관 (臺官)을 불러 달래며 말하기를, “이미 정함을 지후로 정한 명령을 거두었다.” 라고 하였다. 대관이 절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이때 왕의 아우 대령후(大 寧侯) 왕경(王暻)이 도량이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정함이 대관을 모 함하려고 몰래 산원(散員) 정수개(鄭壽開)를 꾀어 대성(臺省) 및 이빈(李份) 등이 왕[大家]을 원망하여 왕경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모의하였다고 무고(誣 告)하였다. 왕이 이에 현혹되어 간신(諫臣)을 제거하려고 하니 김존중(金存中) 이 간언하여 중지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조사하고 신문해 달라고 청하였 으나 과연 증거가 없었다. 정수개에게 묵형(墨刑)을 주고 흑산도(黑山島)에 유배 보냈고 이빈은 운제현(雲梯縣)에 유배 보냈다.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5년 윤4월]

3.3 의종의 세력유지를 위한 노력

문신들은 국왕의 측근 세력이 강화되는 것에 대해서 반발을 합니다. 의종의 입장에서는 문신을 회유해야 되기 때문에 대간의 요구를 수용하고 문신들과 자꾸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창화, 시를 주고 받는 행사들을 많이합니다. 문신들로부터 “대평호문지주”라는 칭송을 듣고 시문적 취향이 강한 소장 문신들이 결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 “상정고금예문”을 편찬하게 됩니다. 의종은 즉위 당시부터 본인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환관도 가까이 하려고 하고 내시도 가까이 하려고 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문신들에 대해서도 회유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신을 선호하게 됩니다.

4. 시위부대 비호와 갈등

4.1 무신을 선호하게 되는 의종

의종은 내시도 가까이 하려고 하고 여기에는 반대하는 문신들에 대해서도 회유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른한편으로는 무신을 선호하게 됩니다. 이것은 시위부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입니다. 의종입장에서는 자기 신변 보호가 어렵다. 라고 하는 현실 인식 속에 자기의 주변에 군사를 배치하는 시위부대를 강화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무신들을 총애하게 되고 그럼 무신들과 무엇인가 교류를 할 수 있는 소통코드가 필요하기 때문에 격구와 수박을 즐깁니다.

격구는 사진에 나온 것처럼 말을 타고 공을 치는 이런 모습들인데요. 궁궐에서 격구를 국왕이 자주했습니다. 구정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격구를 하게 되는데 격구라고 하는 게 일단 상당히 과격한 스포츠이기도 하고 또 격구를 잘하려면 신체조건이 좋은 무사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의종은 각지에 공문을 보내서 격구를 잘하거나 신체적 조건이 좋은 군사들을 뽑아 올리도록합니다.

4.2 이의민의 발탁

그때 경주 지방에서 ‘이의민’이라는 사람이 발탁이 됩니다. 경주안찰사가 이의민이라는 사람과 그 삼형제가 그 지역의 왈패로 힘을 쓰고 돌아다니는데 데려다가 징벌을 하는 과정에서 두 형제는 죽어버리고 이의민만 살아남습니다. 키가 기록에 의하면 8척에 가까웠다고 8척은 2.67미터이며 어마어마한 체구를 가진 이의민이 모진 고초 끝에 살아남은 것을 보고 경주안찰사 ‘김자양’이라는 사람이 이의민을 살려둡니다. 그러던 중 의종이 격구를 잘하는 신체적 조건이 좋은 사람을 뽑아 올리라고 하니까 이의민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천한신분이기 때문에 장교직으로 올라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발탁이 돼서 격구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의종의 총애를 받게 되고 장교직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4.3 문신들의 견제

이런 식으로 상당히 무력을 쓰는 건장한 신체조건이 좋은 무신들이 왕의 주변에서 격구와 수박을 하고 그것이 끝나면 왕과 식사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를 무신들이 좋아할리는 없었습니다. 또 그런만큼 국왕의 입장에서는 격구와 수박이 일종의 군사 훈련이었습니다. 이로인해 시위부대가 강화되었습니다. 또 이들과 사냥을 즐기게 됩니다. 의종의 ‘수박과 격구를 즐겼다, 사냥을 즐겼다’하는 것은 왕권이 약한 의종의 입장에서는 시위부대를 강화하는 조치였다. 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격구를 통한 무신들의 결속이 강화되니까 이것에 대해서 문신들은 강력하게 반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문신들은 끝없이 “격구 주마를 자제해라, 그리고 무언가 국왕이라고 한다면 신료들과 함께 선대의 좋은 정치를 가지고 논의를 하고 국왕의 도리를 다해야할 것 아니냐”라고 강조를 합니다. 힘이 없는 의종의 입장에서는 문신들의 강력한 반발에 굴복을 하게 되어 타협을 하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무신과는 좀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고 문신들과 관계를 맺다 보니까 창화, 시를 짓고 잔치를 많이 하게 됩니다. 의종에 의해서 권력의 맛을 봤던 무신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에 빠지게 되고 점점 고조되게 됩니다. 이에 당시의 상황을 알려 줄 수 있는 사료를 소개하겠습니다.

[관련 사료]
전 임금〈毅宗〉이 새로 즉위하자 격구(擊毬)와 말타기를 좋아하며 간언을 받아들이기를 싫어하였다. 공이 이에 대궐문에 엎드려 극언(極言)을 바치니, 임금이 노하여 공을 안남도호부사(安南都護府使)로 삼았으나, 곧 상서좌사낭 중 지제고(尙書左司郎中 知制誥)로 고쳤다. 다시 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 官)을 더하고 금자복(金紫服)을 하사하였다.
[김영부묘지명]

즉 김영부라는 사람의 묘지명에 나와 있는 이 글로 볼 때 의종은 즉위를 하자마자 격구와 말 타기를 즐겼고 가난을 싫어했다, 그런데 문신이었던 본인은 이에 대해 반대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다.

5. 문신과 무신의 갈등

5.1 무신들의 차별에 대한 불만

이처럼 의종의 입장에서는 환관, 문신 무신을 둘러싸고 무신과 자기의 정권강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시도를 하과정 속에서 무신 우대, 우월적인 지위는 있지만 반발을 가지고 있는 세력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러던 차에 문무의 갈등이 점점 구체화됩니다. 고려시대는 문신과 무신이 상당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제도적인 규정에 다라서도 무신은 재상이 되기가 어려웠고 국왕의 측근으로 정치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승선과 대간들과 같은 중요한 국왕의 비서라던지 국왕과 신료의 잘잘못을 간하는 대간과 같은 고려의 중요한 직책도 전부 문신들이 차지했습니다. 또 재상의 지위들도 전부 문신들이 차지하고 또 무신에 대한 인사권도 문신들이 장악을 하고 있고 군사적인 상황이 필요할 때 최고 사령관의 지휘도 전부 문신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무신들은 차별에 대한 불만이 항상 존재했습니다.

5.2 일반군인들마저 어려운 상황

그러면서 문신이 우위에 있는 상황 속에서 무엇인가 상호 타협을 하는 가운데 의종대에 이르러서는 문무의 갈등들이 상당히 격화되고 일부 문신이 낮은 신분 출신의 무신들에 대해서 공격을 하고 인격적인 비하나 조롱을 하는 사건들이 발생을 합니다. 이런 사건들이 무신의 일부세력들이 문벌귀족들의 지배체제인 고려 체제에 대해서 반발을 일으키게 합니다. 또 일반 군인들은 일반 군인들대로 현실적인 어려운 조건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려의 인종이나 예종 때 왕의 행차가 잦고 잔치를 자주하고 음양도참에 따라서 이궁을 자주하고 토목공사를 하는 와중에 일반군사들이 동원되며 일상적으로 추위나 배고픈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서 직업군인인 무신들도 불만을 갖게 되고 일반 군인들도 불만을 갖게 되기 때문에 무신난이 일어나자마자 일반 군인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는 기록으로 볼 때 지배 권력에 있는 무신들에 의해서만 난이 성공한 것이 아니고 일반 군인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서 무신난이 성공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신들의 어려움을 알려주는 사료를 소개하겠습니다.

[관련 사료]
신유일. 왕이 평복차림으로 몰래 금신굴(金身窟)까지 가서 나한재(羅漢齋)를 열고는 현화사(玄化寺)로 돌아와 이공승(李公升)·허홍재(許洪材)·각예 등과 함 께 중미정(衆美亭) 남쪽 못에 배를 띄우고 취토록 마시며 한껏 즐겼다. (중략) 정자를 지을 당시 부역에 동원된 일꾼들은 개인적으로 양식을 지참해야 했는데 한 역졸이 너무 가난한 탓에 양식을 댈 수가 없는지라 동료 일꾼들이 다들 밥 한 술씩을 갈라서 먹여주었다. 하루는 그 처가 음식을 장만해 와서 먹게 한 후, 친 한 사람을 불러다 같이 먹으라고 권했다. 그 일꾼이, “가난한 살림에 어떻게 이 런 음식을 마련했소? 딴 남자에게 몸을 팔아 얻은 것이오? 아니면 훔친 것이오?” 라고 닦달하자 그 처는, “용모가 추한데 누가 나와 통정할 것이며, 나같이 겁이 많은 여자가 어찌 남의 것을 훔치겠소? 머리털을 팔아 사왔을 뿐이요.”라며 깎 은 머리를 보여 주었다. 그 일꾼이 흐느껴 울며 음식을 삼키지 못했고 듣는 사람 들도 다들 슬퍼했다.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21년 3월]

이 기록으로 볼 때 일반 군인들은 공사에 참여 할 때 양식을 자신이 대야하고 양식을 대지 못하는 동료들은 동료끼리 밥 한술씩 나눠먹고 그 부인은 자기 머리카락을 팔아서 양식을 구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일반 군인들과 일반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체제 변혁에 대한 욕망도 있었겠지만 고달픈 현실을 타개하려는 생각들에 무신난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게 되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종은 즉위 당시부터 왕권자체가 약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로부터 후계자로 지목되는 단계에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승명의 도움으로 겨우 즉위를 했습니다. 하지만 왕권이 약하기 때문에 측근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환관세력, 내시라는 측근세력, 문신과의 창화 뱃놀이, 무신들과의 격구 말타기를 하기도 하지만 문벌귀족, 문신 관료의 반발에 부딪혀서 무의로 끝나게 되고 의종의 권위는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되고 고려사회는 무신집권기라는 새로운 집권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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