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무신정변의 발발배경 혹은 발생 과정, 결과와 같은 내용들을 사료를 참고하여 설명드리겠습니다. 사료를 차근차근 읽다보면 무신정변을 한번보면 까먹지 않게 될 것입니다.
1. 무신정변의 발생
무신정변은 1170년(의종 24년) 8월 30일(정축) 당시 상장군이었던 정중부와 하급 장교인 이의방, 이고, 채원 이의민 등이 개경 근처의 보현원에서 일으킨 쿠데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를 무신들이 일으킨 정변이기 때문에 무신의 난 혹은 무인의 난이라고도 부르며, 무신정변이 일어난 해가 경인년이기 때문에 경인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정변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고급 간부가 정중부였기 때문에 정중부의 난이라고도 부릅니다. 무신정변 이후로 관리 체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무신이고, 무력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부를 때는 무인이라고 하는데 이 기간을 설명할 때는 무신과 무인을 혼재돼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는 무신이 집권세력으로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치적 변동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인 변화까지도 수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신들이 일으켜서 세워진 정권, 무인정권은 1170년부터 임유무가 제거되서, 몰락될 때까지 1270년까지 100년간 존속되었습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된 정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다 보면 무신정변 이후를 기점으로 후기로 삼기도 합니다. 특히 고려가 1왕조 3체제라고 했을 때 문벌관료 혹은 귀족집단들이 주도하던 시대가 끝나고 무인들이 지배한 시대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고려왕조의 두 번째 체재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무신정변 발발 직전의 상황
발발 직전의 상황을 모두가 알고 있을법한 유명한 사건인 5급관료가 대장군의 뺨을 때린 것을 사료를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관련사료] 무신난 발생 직전 상황
1170년 의종 24년 8월 정축일. 왕이 보현원으로 행차하려고 문 앞에 이르러서는 근신들을 불러 술잔을 돌렸는데, 술에 취하자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장하도 다. 이 땅은 군사들을 연습시킬 만하다.”라고 하였다. 무신에게 명하여 다섯 병사 로 하여금 수박희(手搏戲: 손과 손을 쳐서 승부를 내는 게임, 승자: 술 3잔, 패 자:1잔)를 하게 하였는데, 왕이 무신들이 불만을 가지고 원망하고 있음을 알고 있 어 후하게 하사하여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한뢰는 무신들이 임금의 총애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시기하는 마음을 품었다.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이 한 사람과 서로 치다가 이소응이 이기지 못하 고 달아나니 5품 한뢰가 앞으로 나가 그의 뺨을 때려 즉시 계단 아래로 떨어뜨리 자 왕과 여러 신하들이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고 임종식과 이복기(李復基) 는 또 이소응에게 욕을 하였다. 이에 정중부·김광미(金光美)·양숙(梁肅)·진준(陳 俊) 등이 얼굴빛이 변하고 서로 눈짓을 하더니 정중부가 화가 난 소리로 한뢰를 꾸 짖으며 이르기를, “이소응은 비록 무신이나 관직이 3품인데 어찌 욕보임이 이 리 심한가.”라고 하였다. 왕이 정중부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 화해시켰는데 이고 가 칼을 뽑고 정중부에게 눈짓을 하니 정중부가 그를 저지하였다.
사료를 보면 무신들을 보면서 격려도 하면서, 맨손으로 승부를 가리는 게임인 수박희를 시킵니다. 여기서 승자에게는 술을 석잔 주고 패자에게는 한잔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는 두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첫 번째 당시 왕이 무신들의 불만을 타개하려고 후하게 하사해서 위로하여는 시도였다. 두 번째는 무신들을 조롱하기 위함이였다.라는 입장도 있습니다만, 왕의 입장에서는 무신들에게 위로의 자리를 만들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무신정변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를 사료로 살펴보겠습니다.
3. 무신정변의 발발과 전개
[관련사료] 무신난의 발발 상황
날이 어두워지고 어가(御駕)가 개성 근처 보현원 가까이에 이르자, 이고가 이의방이 먼저 가서 왕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순찰과 치안을 담당하는 군대를 모 았다. 왕이 막 보현원 문에 들어가고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려 하는데, 이고 등 이 내시 임종식과 이복기를 문에서 손으로 때려 죽였다. …… 한뢰는 친한 환관에게 의지하여 몰래 안으로 들어가 왕의 침상 아래 숨었다. 왕이 크게 놀라 환 관 왕광취(王光就)로 하여금 그를 막게 하니 정중부가 말하기를, “화의 근원 인 한뢰가 아직 임금님 곁에 있으니 그를 내보내 베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내시 배윤재(裴允才)가 들어와 아뢰었으나, 한뢰가 왕의 옷을 잡고 나오 지 않자 이고가 또 칼을 뽑고서 그를 위협하니 곧 나왔으므로 즉시 그를 죽였다. …… 그리고 국왕의 비서, 측근관리, 환관을 비롯하여 국왕을 따르던 문관(文官)과 대소 신료가 희생되어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관련사료] 무신난의 전개 상황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안(慰安)하려고 여러 장수들에게 칼을 하 사하니 무신들이 더욱 교만하였고 횡포를 부렸다. …… 정중부와 이의방이 기뻐 하며 말하기를, “일이 이미 성공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무리는 머물러 행궁(行宮)을 지키면서 날래고 용감한 이를 선발하여 곧바로 개경으로 달려가게 하여 가구소(街衢所)에 이르러 별감(別監) 김수장을 죽이고, 곧바로 대궐로 들어 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양순정, 사천감(司天監) 음중인, 대부소경(大府少卿) 박보균, 감찰어사(監察御史) 최동식, 내시지후(內侍祗候) 김광 등 내직(內直) 관료를 잡아 모두 죽였다. …… 이고와 이의방 등이 순검군을 이끌고 밤에 태자궁 (太子宮)에 이르러 행궁별감(行宮別監) 김거보와 원외랑(員外郞) 이인보 등을 죽였다. 또 천동택(泉洞宅)에 들어가 별상원(別常員) 10여 인을 죽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길에서 소리치기를, “모든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 하더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라고 하였다.
[관련사료] 무신난의 마무리 단계
군졸[卒伍]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치사(致仕)한 최유칭 (崔褎稱), 판이부사(判吏部事) 허홍재(許洪材) …… 등 50여 인을 찾아 죽였다. 왕이 더욱 두려워하여 정중부를 불러 난을 그치게 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정중부는 네네 하기만 하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왕이 즉시 이고·이의방을 응양용호 군중랑장(鷹揚龍虎軍中郞將)으로 삼고, 나머지 무인 중 상장군(上將軍)에게 는 전례대로 수사공복야(守司空僕射)를 더하고, 대장군에게는 상장군을 더하였으며, 이의방의 형 이준의(李俊儀)는 승선(承宣)으로 삼았다. 정중부 등이 왕 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왔다.
사료에는 “모든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 하더라도 씨를 남기지 말아라”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무신들이 문신들을 제거하는 참혹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이 표현이 보여줍니다. 무신정변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면서 일반 초창기에는 장교들이 주로 문신을 제거했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일반 장병, 군졸들이 벌떼 처럼 일어나서 50여인의 문신들을 찾아 죽이게됩니다. 그렇게 왕은 무신들을 주 관직 무사의 ㅈ기위 혹은 임김의 비서에 자리에 앉히여 난을 그치게 합니다.
4. 무신정변에 대한 사관의 평가
당시에 무신정변에 대해서 후대의 사관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관련사료] 무신난에 대한 사관의 평가
사신 유승단(兪升旦)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는 한 몸으로 서로 협력하므로 옛날의 현명하고, 어진 임금[哲王]은 문무를 좌우의 손과 같이 보아서 피차와 경중이 없었으니 임금은 위에서 밝고 신하들은 조정에서 화합하여 반란의 화(禍)가 이로부터 일어나지 않았다. 의종이 처음 정치를 할 때 본보기가 되어[規模] 볼 만한 것이 있었으니, 진실로 충성스럽고 바른 사람을 얻어 왕을 보좌하게 하였다면 반드시 선정을 하여 후세에 칭찬을 들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첨을 잘하고 말만 잘하는 무리와 경박하고 시끄러운 무리들이 좌우에 늘어서 있었고, 재회(齋會)와 초제(醮祭)에 재물을 기울여 없애며,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아야 할 시간을 주색으로 옮겼고, 시를 짓고 흥취를 내 노는 것으로 임금과 신하가 정사를 논하고 문답하는 것을 대신하였으니 점차 무신들의 분노가 쌓여 화가 장차 이르렀다.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8월 정축]
정리하자면 이 사관은 무신정변의 배경으로는 의종의 실정을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즉 의종이 정치를 잘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난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무신정변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학설, 원인을 진단하는 입장들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5. 무신정변 왜 일어났는가
5.1. 문무의 차별
가장 고전적인 견해는 문반과 무반의 차별에 따른 무신들의 불만 때문에 무신정변이 일어났다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이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즉 당시에는 고려 전시기를 거쳐서 문치주의적인 경향이 강하고, 문신의 지위가 무신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5.1.1. 제도화 된 문무의 차별
그리고 전쟁이라던지 군사적인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군사지휘관, 최고사령관을 항상 문신이 맡았습니다. 거란족과 싸운다거나, 여진족을 정벌할 때의 사령관이었던 서희 장군, 강감찬 장군, 윤관 장군은 전부 과거에 급제한 문신들이었습니다. 또한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 사령관 또한 대표적인 문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군사 지휘권이라던가 군사 사령관을 문신이 차지한다. 라고 하는 것은 문무의 차별이 제도화 되어 있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5.1.2. 경제적인 간극
그리고 관등에 있어서도 무신은 정3품인 상장군이 최고직에 해당됩니다. 그 이상은 승진이 불가하고, 2품 이상의 재추직은 전부 문반이 독차지하게 됩니다. 이는 관등에 있어서도 차이가 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관등에 따라 지급되는 전시과, 즉 경제적인 대우도 당연히 무신들은 문신에 미치지 못했을 겁니다. 이처럼 정치, 경제적인 지위가 낮다 보니까 사회적으로도 문신에 비해서는 훨씬 더 낮은 대우를 받고, 또 관등이 더 낮은 문신이 더 높은 무신을 조롱하거나 놀리는, 그런 사례들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5.1.3. 사회적인 천시
그래서 흔히 무신정변의 원인으로 뽑는 것 중에 하난가 무신 중 가장 높은 직급인 상장군에 해당되는 정중부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수염이 촛불로 태워지는 수모를 당합니다. 이 때 정중부가 김돈중을 향해 위해를 가하는데, 김부식이 나서서 왕에게 극언을 하며 정중부의 관직을 뺏어버린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문신 한뢰에게 보현원에서 뺨을 맞는 사건들이 발생을 하게 되고, 문무의 제도적인 차별, 경제적인 간극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입장에서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것이 무신정변의 원인이었다. 라고하는 것이 첫 번째 학설입니다.
5.2. 일반 군인들의 불평
두 번째 무신정변의 원인으로는 일반 군인들의 불평, 불만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일반 군인들이 호응을 하지 않았거나, 협조를 하지 않았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의 사료에서 봤던 일반 장졸들이 벌떼 처럼 일어났다. 라고 하는 표현을 기억하시나요? 이와 같이 일반 군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통해 성공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신정변의 결정적인 성공 원인에는 일반 군인들의 불평불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라는 이기백 교수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일반 군인들이 전쟁 때 참여해서 어려운 훈련, 전투를 겪을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공사에 동원되고, 또 문신들이 국왕과 함께 잔치를 하면 주변에서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호위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 고역에 처해있었습니다. 또 현재의 월급이라고 할 수 있는 군인전 등 경제적 지급도 되지 않았기 대문에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반 군인들의 불평, 불만이 누적 돼서 장교들이 난을 일으키자 거기에 적극 호응한 것. 이게 무신정변의 성공의 원인이었다. 라고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5.3. 무반계층의 현실적 세력 성장
무반들이 사회 전반의 차별에도 불구하고 점차 그들 세력을 성장시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지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문신들과 혼인을 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993년(성종 12) 이래 세 차례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 속에서 무신의 지위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게 되고, 예종대에 들어서는 여진 정벌을 위한 별무반, 인종대 이자겸의 난의 진압, 묘청의 난과 같은 대내외적인 정변과 전쟁을 통해 지위를 향상 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신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억무정책과 문신들의 차별과 조롱이 있었기 때문에 무신들의 불만이 더욱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약 무신들이 대내외적인 정변과 전쟁의 성장이 무신들이 난을 일으킬만한 정도의 지위에 까지 올라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5.4 의종의 실정失政
의종대 정치 기강의 문란, 백성들로부터의 착취 가중, 무신들에 대한 천대 극에 달했습니다. 의종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 회복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좋은 정치를 펴고자 노력하였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국왕과 문신세력간에 심한 대립, 갈등이 야기되었습니다.
이는 무반에 대한 억제정책과 파행적 운영이 의종대의 정치실태와 연관되어 무신정변이
발발하였다고 이해되기도 합니다. 또한 의종이 왕권의 강화를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국왕의 총애를 받아오던 무신들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무신정변의 발발이유를 다양하게 해석 할 수 있지만 어떤 하난의 역사적 사건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보기 보다는 적어도 70년 정도의 지속적인 고려사회의 변질과정, 그 속에서 다양한 요소가 결합되어서 무신정변이 발발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